오프라윈프리와 김꽃두레
예전에 어느 프로그램에선가 개그우먼 안영미가 이런 말을 했다. 팬들이 보낸 팬레터에 "저도 언니처럼 막 살고 싶어요."하는 글들이 올라오는데 사실 자기는 그렇게 막 사는 사람이 아니라서 좀 억울하다는 이야기였다.
그땐 그냥 그런가보다 했다. 당연히 방송과 현실은 다르겠지, 현실에서 가슴춤 추고 다니는 여자가 어딨겠나, 했다.
그런데 요즘 들어서는 그 말이 진짜였구나, 싶다. 안영미가 고정 엠씨로 나오는 라디오스타 재방송을 종종 보는데 진행을 정말 잘한다. 단순히 웃기다는 말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가 예전부터 봐오던 안영미의 모습에 비한다면 노잼에 가깝다. 하지만 다른 방식으로 제 역할을 한다. 조력자의 역할이다. 자기를 내세우기보다 출연자들이 하는 이야기를 누구보다 열심히 듣고, 적절한 반응을 해준다. 외향적이고 기가 센 출연자는 조금 눌러주고, 예능에 익숙하지 않아 긴장한 모습을 보이는 출연자에게는 용기를 북돋아준다. 그리고 그들로부터 최선의 모습을 이끌어낸다. 언젠가 이경규가 후배 개그우먼인 장도연에게 19금 개그로 이미지 소비시키지 마라, 너는 나중에 한국의 오프라 윈프리처럼 되어야 한다, 하는 조언을 했다는데 지금 안영미의 모습을 보며 그 일화가 떠오를 정도다.
이런 생각을 하는 건, 나는 안영미처럼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작년에 페미니즘에 대한 책을 내고 유명한 유튜브 채널에서 라이브 방송 게스트로 초대된 적이 있었다. 구독자가 수십만에 라이브로만 수천 명이 보는 채널이었다. 그런데 엠씨가 나는 솔로 4기 정자의 페미 논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냐는 질문을 했다. 저질이라고 생각했다. 무려 작가씩이나 되는 사람을 앉혀놓고 무슨 그딴 질문을 하냐고 속으로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공개된 자리에서 다른 출연자에게 상처가 될 수 있는 이야기를 굳이 하고 싶지는 않다고 말을 돌렸다. 품격있는 답변이기는 했다. 그런데 재미는 없었다. 사람들은 내가 망가지는 모습을 보고 싶어했지만 나는 작가로서의 품격과 자존심을 지키기를 택했다. 그래서 묻혔다. 내 책을, 그리고 나라는 사람을 몇 천 명의 사람들 앞에서 알릴 수 있는 기회를 놓쳤다. 결국 3년이 넘는 시간 동안 내 모든 주말과 저녁 시간을 바쳐가며 만든 첫 번째 책은 실패로 돌아갔다.
아마 안영미도 그랬을 것이다. 한 인간으로서 자기가 하고 싶은 것, 그리고 사람들이 안영미라는 개그우먼에게 원하는 것 사이에서 갈등했을 것이다. 당연히 자존심과 이미지를 지키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는 이도 저도 안 될 거라는 걸 알았을 것이다. 이국주나 이수지처럼 뚱뚱한 것도 아니고, 오나미나 신봉선처럼 못 생긴 캐릭터로 가기에도 애매하고, 그렇다고 안소미같은 미녀 개그우먼도 아닌, 특색 없는 개그우먼으로 묻혀버렸을 수도 있다. 그래서 가슴춤을 추고, 김꽃두레 연기를 하길 택했을 것이다. 무슨 짓을 해서든 일단 유명해지고 나면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할 기회를 얻을 수 있지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만 해서는 유명해질 수가 없고, 결국 내 이야기는 누구에게도 전해지지 못할 거라는 걸 잘 알았기 때문에 그랬을 것이다.
그게 부러웠다. 하고 싶은 것을 하기 위해 해야 할 일을 하는 인내심, 그 과정에서도 자기의 지향점을 잊지 않는 뚝심과 자기 확신이 부러웠다. 나도 그런 걸 갖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