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약영업에 대한 크나큰 오해
팀 카톡방에 이 사진이 올라왔다. 어느 내과 원장이 의대 증원 반대 시위에 제약회사 영업사원들을 동원했다는 내용이었다. 다들 "ㅋㅋㅋㅋㅋㅋㅋㅋㅋ"하고 웃어 넘겼다. 뭐 저런 또라이 같은 작자가 다 있나, 하면서.
그런데 잠시후에 만난 어느 거래처 원장이 그 얘기를 한다. 사석에서 주고 받은 이야기를 다 인터넷에 올려버리면 앞으로 원장들이 제약회사 영업사원들을 어떻게 믿겠냐는 것이었다. 이런 어리석은 행동들 때문에 앞으로는 너희 영업사원들이 일하기도 더 어려워질 거라고 했다.
의아했다. 어떻게 알았지? 저건 그냥 디시 인사이드 커뮤니티에 올라온 글인데? 원장이 디시를 하는 건가? 그리고 알게 되었다. 이게 네이버 메인 기사로 뜰 정도로 공론화되었다는 사실을.
제약회사에서 영업을 한다고 하면 많이 물어보는 것 중에 하나가 원장이랑 룸살롱 자주 가냐는 거다. 물론 나는 대부분의 경력을 제약이 아닌 의료기기 업계에서 보냈다. 그나마도 총 경력 7년 중 2년은 내근직으로 근무했다. 그래서 제약업계에 대해 정확히 안다고 말하긴 어렵다. 하지만 적어도 5년 동안 의사들을 상대해본 경험에 비추어볼 때, 그런 일은 한 번도 없었다. 내 주변 선배나 후배가 원장이랑 그런 데를 드나들었다는 얘기도 들어본 적이 없다. 팀장님이나 부장님들이 신입사원이던 시절에나 먹히던 이야기지 요즘 세상에 그런 거 하면 큰일난다.
이번 의대 증원 반대 시위도 그렇다. 김포시에 있는 300개 병원에서 100명 정도의 원장을 만났는데 나한테 시위 나오라는 사람 하나도 없었다. 내가 아직 이직한지 얼마 안된 거라 그런 걸 수도 있는데, 회사에서도 그런 요구를 받았다는 사람 하나도 못 봤다. 만약 사람들이 알고 있는 것처럼 이런 게 비일비재하게 벌어지는 일이라면 아마 이런 일에 대처하기 위한 메뉴얼을 회사에서 마련해주었을 것이다. 원장이 집회에 참석하길 요구한다면 '원장님, 죄송합니다만 저희에겐 정치적 중립에 대한 의무가 있기 때문에 집회에 참석하긴 어렵습니다.'하며 정중하게 거절해라, 혹은 참석만 하되 눈에 띄지 않게 조심해라, 뭐 이런 식으로. 그런데 그런 건 없다. 매일 같이 의사를 상대하는 제약영업사원들이 봐도 저건 상식적으로 있을 수가 없는 일인 것이다.
물론 있긴 있을 거다. 여자 영업사원에게 나랑 섹스해주면 약 써주겠다고 하는 원장도 있을 거고, 간호조무사나 사무장에게 수술을 대신 시키는 의사도 있을 거고, 임산부를 수면마취 시켜놓고 성추행을 하는 산부인과 의사도 있을 거다. 그런데 그런 놈들은 어딜 가도 있다. 그런 놈들은 어딜 가도 그런 짓을 한다. 그런 인간들이 의사가 되었을 뿐이다. 의사들이 다른 직업군에 비해 특별히 더 도덕성이 높다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그렇다고 그렇게 부도덕하지도 않다. 딱 우리만큼 선하지만 때로는 우리만큼 악한, 그냥 사람일 뿐이다.
그런데 왠지 저런 의사들이 많을 것만 같은 기분이 드는 건 왜일까? 그건 이미지의 힘이다. 사람의 뇌는 통계 수치보다 구체적이고 생생한 사례에 더 민감하게 반응한다. 그래서 유니세프 광고는 "지금 이 순간 전세계 아이들의 25%가 하루 1달러 미만의 생계비로 생활하고 있습니다."가 아니라 "아프리카 세네갈의 오지 마을에 사는 6살 여자아이 알리사는 오늘도 물 양동이를 길러 하루 20km를 걷습니다."하는 식으로 만든다.
의사에 대한 인식 역시 마찬가지다. 제약영업사원들에 대한 도 넘은 갑질과 인격적 모독, 문란한 사생활을 일삼는 의사들은 극소수라고 백날 말해봤자 소용이 없다. 어차피 우리의 기억에 남는 건 오징어 게임에서 탈락한 희생자들의 배를 갈라 장기 매매를 하던 외과 의사, 실적 압박에 시달리다 자살했다는 영업 사원에 대한 이야기들이다. 물론 좋은 의사들에 대한 이야기도 있다. 낭만닥터 김사부 같은 드라마도 있고, 이국종 교수님에 대한 다큐멘터리도 있다. 그런데 그렇게 책임감 있고 권위의식 없는 좋은 의사들의 이야기를 하려면 어쩔 수 없이 돈만 밝히고 엘리트 의식에 찌든 의사들을 등장시켜야 한다. 우리의 기억에 남는 건 그런 것들이다.
그럼 이런 이미지들은 왜 만들어지는 걸까? 사람들이 그걸 원하기 때문이다. 그들이 우리보다 돈을 많이 버는 게, 결혼 시장에서 더 선호받는 게, 사회적 지위가 높은 게 마음에 안 드는 거다. 그래서 끌어내리고 싶은 거다. 저들은 많이 배웠고 돈을 잘 벌지만 내면은 황폐할 거야. 공부만 하느라 이기적이고 사회성도 떨어질 거야. 이렇게 믿고 싶은 거다.
그래서 좋은 의사들의 이야기는 조회수가 안나오고, 나쁜 의사들 이야기는 조회수가 폭발한다. 그래서 기자나 유튜버들은 그런 이야기들만 내보낸다. 그 이야기들은 고정관념이 되어 우리 머릿속에 박힌다. 제약영업이라고 하면 의사랑 룸살롱가서 꼬추로 폭탄주 만들어 먹는 모습이 떠오르는 건 그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