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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선비 Aug 30. 2023

나는 솔로가 잘못했네

연애 예능이 대한민국 사회에 끼친 해악에 대하여

나는 솔로 오프닝씬에서 종종 엠씨들이 2030세대의 비혼, 비출산이라는 사회적 이슈에 대해 언급할 때가 있다. 요즘 청년들이 연애와 결혼 때문에 얼마나 힘들어하고 있는지, 그런 와중에 나는 솔로가 결혼 권장 프로그램으로서 얼마나 선한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지를 이야기하곤 한다. 


그런데 정말 나는 솔로와 같은 프로그램이 혼인률 증가에 긍정적 영향을 미칠까? 나는 아니라고 본다. 나도 예전에 나가본 적이 있고, 덕분에 평생에 두 번 다시 겪어보지 못할 소중한 추억을 얻었지만 이 프로그램은 대한민국의 비혼, 비출산 문제 해결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오히려 악영향을 미친다.




육아 예능을 생각해보면 이해하기 쉽다. 내 친구 같은 애들이 연애하는 나는 솔로, 아이돌처럼 올망졸망 예쁘게 생긴 애들이 연애하는 하트시그널, 섹시하고 기 쎈 애들이 연애하는 솔로지옥, 돌싱들이 연애하는 돌싱글즈, 성소수자들이 연애하는 남의 연애까지. 요즘은 연애 예능의 전성시대다. 하지만 몇 년 전까지 대세는 육아 예능이었다. 채널만 돌리면 귀엽고 순수하고 사랑스런 아이들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축구선수 이동국의 막내 아들인 대박이, 방송인 샘 해밍턴의 아들 윌리엄과 벤틀리 형제 등은 수많은 랜선 이모와 삼촌들로부터 여느 톱스타 못지 않은 사랑을 받았다.


그런데 막상 육아 예능은 출산율 증가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상대적 박탈감을 자극했기 때문이다. 유사 이래 불평등은 늘 존재해왔다. 상놈의 자식들이 제 이름 석자 쓰는 법도 못 배우고 뒷산에 나무 베러 다닐 때 양반댁 자제들은 서원이나 향교에 들어가 사서삼경을 공부했다. 그리고 과거에 급제하여 부모들의 사회적 지위를 물려받았다. 하지만 그땐 그게 별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때는 SNS가 없었기 때문이다. 상놈들이 사는 세상과 양반들이 사는 세상이 완전히 분리되어 있었기 때문에 상놈들은 양반들이 뭘 하고 사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러니 질투를 느낄 수도 없었다. 양반은 양반대로, 상놈은 상놈대로 그냥 저냥 살았다.


그런데 육아 예능이 그 지옥문을 열어버렸다. 육아 예능에 나오는 아이들은 평범한 아이들이 아니다. 경제적으로 유복하며 사회적 지위가 높은 유명인들의 아이들이다. 그런 그들이 누릴 수 있는 경험, 부모로부터 받을 수 있는 지원들은 평범한 아이들의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해외 여행, 고급 스포츠, 전문가로부터의 상담과 세심한 건강 관리, 인생의 롤모델이 될 수 있는 명사들과의 만남 등, 삼십대 중반인 나도 못해본 온갖 진기한 경험들을 열 살도 안 된 나이에 다 해본다.


그런 걸 보다 보면 박탈감을 느낄 수 밖에 없다. 아이가 있는 이들은 사랑하는 아이에게 저런 경험을 선사해주지 못하는 자기 자신을 초라하게 여기게 되고, 없는 이들은 저렇게 해줄 게 아니라면 차라리 아이를 낳지 않는 편이 낫다는 냉소적인 생각을 갖게 된다. 지극히 예외적인 삶의 모습이 정상적인 것으로 둔갑해버리면서, 진짜 정상적인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은 아이러니하게도 비정상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연애 예능도 마찬가지다. 원래 알파 메일은 소수다. 남자의 90% 이상은 베타 메일이다. 자연 상태의 인류였다면 평생 짝을 만나지 못하고 홀로 늙어 죽었을 사람들이다. 일부일처제가 있어 그나마 어찌저찌 결혼에 도전이라도 할 수 있게 된 사람들이다. 그러니까 열심히 해야 한다. 열심히 직장에 다니고, 열심히 돈을 모으고, 열심히 여자에게 시간과 노력, 돈과 정성을 바쳐야 한다. 우리 아버지도, 할아버지도, 증조할아버지도, 여러분의 선조들도 모두 그렇게 했다.


하지만 우리 아버지나 할아버지들은 이에 대해 불평불만을 하지 않았다. 내 여자를 지켜주기 위해 희생하는 게, 내 여자에게 남부럽지 않게 해주기 위해 돈을 쓰는 게 당연한 거라고 여겼다. 그땐 연애 예능이 없었기 때문이다. 주변에 친한 친구들의 경험담을 듣는 게 아니라면 남들이 어떻게 연애를 하는지 알 길이 없었고, 주변에 친한 놈들은 다들 수준이 고만고만했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는 잘나가는 놈들, 노력과 헌신, 안정적인 직업 같은 게 아니라 순수한 성적 매력만으로 여자의 몸과 마음을 얼마든지 갖고 놀 수 있는 알파 메일들이 존재한다는 걸 몰랐기 때문이다.


그런데 연애 예능이 그 지옥문을 열어버렸다. 알파 메일의 삶을 곁눈질할 수 있게 되었다. 내 앞에서는 평생 코딱지 한 번 파본 적 없는 것처럼 고결하게 굴던 여자가 알파 메일 앞에서는 얼마나 비굴하고 구차해지는지, 내가 온 마음과 정성을 다 바쳐서도 얻지 못했던 여자의 마음을 저들은 얼마나 쉽게,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고 얻어내는지를 알게 되었다. 그렇게 얻어낸 여자의 마음에도 고마워하거나 기뻐하는 내색조차 하지 않을 정도로 이 모든 것들이 그들에겐 너무나 쉽고 당연한 일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그래서 요즘 남자들에게는 헌신하고 배려하다보면 언젠가 여자도 알아줄 거라는 전통적인 연애 조언이 안 먹힌다. 그런 소리하면 이렇게 반문할 거다. "여자에게 맞춰주라구요? 덱스나 김현우는 그런 거 안 해도 여자들이 알아서 다가오던데요?"




그게 문제다. 원래 남녀관계에서는 남자가 구애를 하고 여자는 받아주는 거다. 그게 자연의 섭리다. 여자가 먼저 구애를 해야 할 정도의 알파메일은 정상이 아니다. 생태 교란종이다. 그런데 지금은 그게 정상이 되어버렸다. 헌신하고 노력하는 남자, 가장 정상적이고 모범적인 남자는 스윗호구남, 퐁퐁남 소리를 듣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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