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이 알파메일인가

by 김선비

우리 회사에서는 매달마다 회의를 한다. 말은 회의라고 하지만 실상은 대표님께 보고를 하고, 깨지는 자리다. 사극에 나오는 어전회의처럼 문무백관들이 옥좌에 앉은 왕을 알현하는 그림을 생각하면 된다.


그날도 여느 때와 같이 회의를 하고 있는데 별안간 대표님이 일장 훈시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목욕탕에서 부력의 법칙을 발견해낸 아르키메데스처럼 당장 급한 일들만 처리할 게 아니라 충분히 심사숙고하며 창의력을 발휘할 시간을 가져야한다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그런가 보다 하면서 듣고 있었는데 2~30분이 넘어가니 슬슬 속이 부글부글 끓기 시작했다. 아니, 지금 우리가 아르키메데스 이야기를 모를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바쁜 사람들을 수십 명 씩 앉혀놓고 무슨 쓸 데 없는 소리를 하고 있어? 당신이 말한 심사숙고해야할 시간에 이따위 소리를 하루 종일 듣고 있으니까 심사숙고할 시간이 없는 거 아냐?


"저 사람은 우리가 자기 얘길 들으면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 하나도 신경이 쓰이지 않는 건가?"


속으로 쌍욕을 퍼붓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내 이야기를 하는 걸 좋아하는 편이다. 내가 써온 글들, 내가 해왔던 사랑, 내가 갖고 있는 꿈. 하고 싶은 이야기들이 너무나 많다. 글을 쓰는 것도 유튜브를 하는 것도 모두 그래서다. 하지만 막상 사람들과 있을 때 내 이야기를 많이 하지는 않는다. 남들이 재미없어할 거라고 생각해서다. 내가 내 이야기하는 걸 좋아한다면 남들도 자기 얘기하는 걸 좋아할 거고, 그러면 내 이야기를 너무 많이 하기보다는 남들이 이야기를 많이 하게 해주는 게 상대방에 대한 배려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되도록이면 내 이야기는 최소한의 문장으로, 최대한의 의미를 담아서, 빨리 끝내려고 한다. 너무 오랫동안 이야기를 한 것 같으면 "너무 제 얘기만 했죠? 재미 없으셨을 텐데." 하는 말을 꼭 뒤에 붙인다.


그런데 대표님에게서는 그런 망설임과 고민이 단 1%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 자리에는 수십 명의 직원들이 앉아있었다. 사원부터 부장, 이사, 20대부터 40대, 50대까지 있었다. 하지만 내가 장담하건대 대표님의 아르키메데스 이야기를 귀담아들은 사람은 그 중에 단 한 명도 없었을 것이다. 다들 나처럼 속으로 욕을 하고 있던지 아니면 그냥 귓등으로도 안 듣고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그걸 조금도 신경쓰지 않았다. 남이 듣건 말건, 자기 욕을 하건 말건, 자기 하고 싶은 얘기를 20~30분 동안 늘어놓았다. 우리가 조금이라도 일찍 회의를 마치고 각자 자리로 돌아가서 업무에 열중하는 것보다 아르키메데스 이야기를 듣는 게 더 생산성을 높이는 길이라는 듯이.


알파 메일이라는 존재가 얼마나 부질없는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우두머리 수컷, 알파메일의 가장 중요한 덕목은 자신감이다. 내가 이 무리에서 제일 잘났다는 믿음, 내 말을 따르면 우리는 무조건 잘될 거라는 믿음이다. 그게 위풍당당한 태도와 강렬한 기세로 표현되고, 사람들은 거기에 반응한다. 여자들은 이끌리고 남자들은 제압당한다. 그게 그를 우두머리 수컷으로 만든다.


그런데 문제는 그 다음이다. 우두머리 수컷이 된 것까진 좋다. 그런데 그 조직이 오래 번창할 수 있을까? 내가 제일 뛰어나다고 믿는 사람이 어떻게 남에게 일을 맡길 수 있을까? 내 생각대로만 이끌어가는 조직이 내 역량 이상으로 성장할 수 있을까? 그렇게 남을 못 믿겠다면, 직원들을 내가 통제하고 가르쳐야 할 사람들로 여긴다면 차라리 개인 사업자로 나 혼자서 다 하는 게 낫지 않을까?


언젠가 나도 리더가 될 거다. 팀장이 될 수도 있고, 가장이 될 수도 있다. 하다 못해 동호회장 같은 거라도 할 것이다. 하지만 알파메일형 리더가 되고 싶지는 않다. 저들이 내게 고개를 숙이는 게 내가 저들보다 잘나서가 아니라는 걸 아는 리더가 되고 싶다. 삼국지의 유비는 관우나 장비만큼 용맹하지도 않고, 제갈량처럼 똑똑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관우, 장비, 제갈량은 모두 그들보다 싸움도 못하고 머리도 안 좋은 유비에게 모두 고개를 숙였다. 그건 유비가 그들을 믿어주었기 때문이다. 유비가 제갈량의 전략을 따르지 않았다면, 관우, 장비를 두고 직접 최전방에서 싸웠다면 촉나라는 진작에 망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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