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선비 Sep 26. 2023

여직원이라고? 2023년에?

처음 이 회사로 이직을 하고 가장 경악했던 것 중에 하나는 여직원이라는 호칭이었다. 공지사항 게시판에 "각 영업 사무소별로 명절 선물을 배송하였으니 상세 내용은 사무소별 여직원들을 통해 확인바랍니다."하는 글이 올라왔던 것이다.


여직원이라는 단어 자체가 문제인 건 아니다. 여직원 휴게실을 만들 수도 있고, 아이가 있는 여직원을 위한 사내 어린이집 혹은 수유시설을 만들 수도 있다. 여직원을 위한 생리공가가 있는 회사들도 있다. 여기서의 여직원이라는 표현은 전혀 어색하지 않다.


문맥의 차이다. 여직원 휴게실이나 수유시설, 생리공가에서의 女가 의미하는 건 생물학적 여성이다. 남자는 모유수유를 할 수도 없고, 생리를 하지도 않는다. 그러니까 女를 강조해야 한다. 그게 아니면 달리 대체할 말이 없다.


하지만 "여직원에게 문의하세요."는 다르다. 여기서 여직원이 의미하는 건 영업 사무소별로 사무를 도와주는 직원이다. 영업사원들이 거래처에서 주문을 받아오면 주문서를 작성해주고, 반품이 들어오면 반품 처리를 해주는 등의 일을 한다. 그건 여자만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남자 직원을 뽑아서 맡겨도 된다. 그러니까 굳이 생물학적 여성을 강조하는 여직원이라는 표현을 써야 할 이유가 없다. 그냥 경리 담당자나 사무보조 담당자, 영업지원 담당자라고 부르면 된다.


물론 이 일을 맡은 직원들이 전부 여자이긴 하다. 그러니까 여직원이라고 부른다 해서 못 알아들을 사람은 없다. 여직원이란 그저 편의상 부르는 호칭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게 볼 수도 없는 게, 영업사원은 20개 사무소에 약 20명씩, 거의 400명이 전부 남자지만 아무도 그들을 남직원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그냥 영업사원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사무소별 4명씩, 80명 정도 밖에 안되는 경리직원에게는 굳이 여직원이라는 호칭을 쓴다.


여직원이라는 호칭이 시대에 뒤떨어졌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그것이다. 사람에겐 여러 가지 정체성이 있다. 나는 남자고, 부모님의 아들이고, 형의 동생이며, 제약회사의 직원이다. 그 중에 무엇이 진짜인가? 그것은 상황마다 다르다. 화장실에 갈 땐 남자고, 명절에는 아들이며, 평일 09시부터 18시까지는 직장인이다. 그렇다면 회사라는 맥락은 어떤가? 회사는 일을 하는 곳이다. 그러니 회사에서 우리의 정체성은 일에 따라 구분되어야 한다. 영업이면 영업, 경리면 경리일 뿐이지, 남자인지 여자인지는 하등 중요하지 않다.


그런데 영화 '삼진그룹 토익반'에 나오던 8090년대에는 왜 여직원이라는 표현이 자연스럽게 쓰였을까? 그 시절에 여직원은 직원이기 이전에 여자였기 때문이다. 영업이나 회계, 인사를 담당하는 직원으로서의 역할보다 사무실의 꽃으로서 아침마다 부장님 커피 타주고, 회식할 때 술 따라주는 역할이 더 중요하게 여겨지던 시절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걸 아직까지 쓰다니, 참 옛스럽다.

이전 17화 자식 교육 잘 시킨 어느 애엄마 이야기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