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건 사랑이었네
얼마전 지인네 집에 모여서 보드게임을 했다. 평소 보드게임에 관심이 있지는 않았는데 지인들이 다들 보드게임 좋아한다고 해서 얼굴이나 볼겸 따라간 것이었다.
생각보다 재미있었다. 내성적인 성격탓에 사람 많은 곳에 있으면 금방 방전되는 편인데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재미있게 놀았다. 이렇게 왁자지껄하게 놀아본 게 언젯적인지도 기억나지 않을 정도였다. 8시쯤 모였는데 정신차리고 보니 새벽 2시였다.
그러던 중 어느 카드 게임을 하는데 멤버 중 한 명이 갑자기 열을 올리기 시작했다. 지금 나와 있는 패 중에 제일 높은 게 몇 점짜리인데, A에겐 패가 두 장 남았고, 그 중에 하나가 1점짜리일 가능성은 얼마나 되고, 6점일 가능성은 얼마가 되고 그러면 경우의 수가 어쩌구 저쩌구... 하면서 신나서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저게 저렇게까지 할 일인가...?
그걸 들으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 보드게임이 재미가 없었던 건 아니다. 반사신경이나 순발력을 요하는 게임도 재미있었고, 추리력이나 숫자에 대한 감각이 필요한 게임도 재미있었다. 그냥 여러 사람 모여서 떠드는 것 자체가 오랜만이라 재밌기도 했다. 근데 저 정도는 아니었다. 그냥 이기면 좋고 지면 마는 거지 뭘 저렇게까지 하나 싶었다. 종이 쪼가리랑 플라스틱 말판으로 하는 놀이 따위에 굳이 경우의 수와 확률까지 동원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았다.
그때 문득 두 달 전에 헤어진 여자친구가 떠올랐다. 예전부터 나에게는 여자친구와 PC방을 가보고 싶은 로망이 있었다. 디아블로2의 재미를 알려주고 싶어서였다. 나는 게임에 관심이 별로 없는 편이다. 옛날에 유행하던 바람의 나라, 포트리스, 메이플부터 최근의 롤이나 오버워치, 배그까지, 한 시대를 풍미한 게임들 중 대부분을 안 해봤다. 그래도 스타크래프트랑 디아블로2는 꽤나 열심히 했다. 하지만 여자친구에게 차마 스타크래프트를 가르칠 엄두는 내지 못했다. 너무 어려웠기 때문이다. 나도 못 이기는 고인물들을 여자친구가 이길 리가 만무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디아블로2는 해봄직하다고 생각했다. 이건 쉬웠기 때문이다. 컨트롤도 전략도, 스토리도 없이 그냥 마우스 클릭하면서 때려잡으면 되는 게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자친구와 한 번쯤 디아블로2는 해보고 싶었다.
그래서 여자 친구를 PC방에 데려갔다. 아니나 다를까 재미있어했다. 앉은 자리에서 3~4시간이 순삭되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이 아이템이 저 아이템보다 왜 좋은지, 왜 이 스킬이 아니라 저 스킬을 써야 하는지를 설명해주려 하자 하품을 하기 시작했다. (애초에 실력을 요하는 게임이 아니지만)실력도 늘지 않았다. 레벨1때 주먹 도끼 들고 고블린 때려잡던 걸 레벨80에도 하고 있었다.
이 쉬운 게임을 왜 이렇게 어려워하지?
의아했다. '여자들은 남자들보다 숫자에 대한 감각이 부족해서 라이프와 마나를 관리하고 디펜스 수치와 공격력을 높여야 하는 게임을 잘 못하는 건가?' '운전도 잘 못하는 것 같던데, 창밖을 보면서 차를 운전하는 것과 모니터를 보며 캐릭터를 조종하는 게 비슷해서 그런가?' 하면서 여자 친구가 이 게임을 왜 어려워하는지에 대해 나름대로 가설을 세워보기도 했다.
그런데 이제 알겠다. 그건 사랑이었던 거다. 보드게임은 재미있다. 하지만 수능 문제를 풀 때처럼 머리를 쥐어짜야 할 정도로 재밌지는 않다. 그냥 사람들 모여서 왁자지껄하는 재미로 하는 거다. 여자친구에게 디아블로도 마찬가지다. 그냥 마우스 좌클릭만 하면서 때려잡는 재미로 하는 거다. 굳이 게임의 세계관이나 스토리, 아이템과 스킬, 육성법에 대해 알고 싶을 정도는 아닌 거다. 그런데 여자친구는 왜 PC방에 갔을까? 왜 관심도 없고 이해도 안 가는 설명을 지루한 티 안 내고 듣고 있었을까? 남친이니까 그런 거다. 그냥 사랑하는 사람이 하자고 하니까 재미없어도 따라간 거고, 재미없어도 듣고 있었던 거다.
그건, 사랑이었던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