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든 날아갈 수 있는 파일럿 프로그램
명절이 너무 좋다. 출근도 안 하고 퍼질러 잘 수 있는데, 어찌 안 좋아할 수 있을까.
한참이나 늦잠을 자다 일어난 후, 리모컨을 누르면 TV에서 온갖 명절 특선 프로그램들이 방송된다.
명작과 최신작들을 공개하는 특선 영화!
가장 핫한 예능 방송의 엑기스들을 뽑아놓은 하이라이트 방송!
방송사별 대표 드라마들의 몰아보기까지!
TV 앞으로 모여든 가족들의 눈길을 사로잡기 위해 많은 프로그램들이 자신들의 맛을 뽐내지만,
그들 가운데, 내 입맛을 사로잡았던 특선은 바로 파일럿 프로그램이었다!
개인적으로 파일럿 프로그램을 정규방송보다 좋아하는 편이다.
파일럿 프로그램에는 정규방송이 절대 가질 수 없는 그만의 매력이 있기 때문이다.
파일럿 프로그램만의 매력! 그것은 도대체 무엇일까?!!
말 그대로 파일럿 프로그램(Pilot Program)이다. 파일럿 프로그램은 정식으로 발표되기 전에 제작된 텔레비전 프로그램이나 에피소드를 말한다. 정식이 아니라 시험 삼아 방송해보는 것이기에, 제작자의 입장에서도 실패에 대한 부담감이 덜하다.
2018년 초, MBC가 예능 프로그램들에 시즌제를 도입하겠다고 보도했던 것도 PD들에게 실패할 자유를 주겠다는 취지에서였다.
http://www.osen.co.kr/article/G1110815879
실패해도 좋다는 것은 많은 제약으로부터 자유를 준다. 실패하지 않기 위한 최선의 방법은, 기존의 성공 사례들을 답습하는 것이다. 하지만 기존 사례를 답습하는 방법으로는, 사람들에게 신선한 즐거움을 전달하며 다음 세대에게 또 다른 길을 제시하는 프로그램을 만들 수는 없다. (중박은 가능해도, 대박은 힘들다는 뜻이다.)
MBC에서만 한 해 평균 10여 개가 넘는 파일럿들이 제작된다. 그 가운데 적게는 2개, 많게는 4개의 프로그램들이 정규편성에 성공한다. 그리고 그중 한 두 편 정도가 히트 프로그램이 되어 장기적으로 자리를 잡는다. 나 혼자 산다(파일럿 : 남자가 혼자 살 때)나 미스터리 음악쇼 복면가왕이라는 히트 프로그램이 제작된 것은, 수많은 시행착오들이 선행되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히트 프로그램으로 성장하는데 실패한 프로그램들에 의미가 없을까? 그렇지 않다.
오디션 프로그램이 인기 있는 이유는, (슈퍼스타같이 완성된 모습이 아니라) 그들의 실패와 성장과정 모두를 지켜볼 수 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반드시 성공한 프로그램만이 즐거움을 주는 것은 아니다. 시행착오를 겪어가는 그들의 과정도 하나의 즐거움이 된다. 내가 파일럿 프로그램을 특히 더 좋아하는 이유이다.
정규방송은 지속성에 대해 고민한다.
방송이 지속적으로 유지되려면, 안정적이고 일정한 포맷을 확립해야 한다. 새로운 소재들을 적용하거나 매회 다른 게스트를 투입하여도 돌아갈 수 있는 틀을 짜야한다는 뜻이다.
그런데 유일하게 그러한 틀로부터 자유로웠던 프로그램이 있었으니, 바로 무한도전이다.
개인적으로 무한도전은 물론 멤버들의 도전도 대단했지만, 그보다는 매회차 새로운 포맷을 연구하여 적용시킨 제작진의 도전이었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노력 덕분에, 무한도전은 짧게는 1회, 길게는 4회 정도의 길이에 하나의 에피소드가 담겼다. 일반적인 예능 프로그램처럼 끝없이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에피소드가 몇 회 안에 끝나는 구조다. 중요한 것은, 그 안에 기승전결이 모두 담긴다는 것이다. 완결된 구성에서 만들어내는 감동은, 기타의 다른 끝이 없는 예능 프로그램에서 주는 감동과는 비교가 안될 만큼 짜임새를 갖춘다. 단편 드라마가 꾸준히 사랑받으며 탄탄한 마니아층을 지니는 이유와 비슷하다.
파일럿 프로그램도 마찬가지다.
태생부터 그 끝을 정해놓고 기획된다. 그리고 그 안에 기승전결이 모두 담긴다. 교훈과 감동까지.
지난 설에 방영되었던 삐그덕 히어로즈의 경우를 살펴보자.
겉으로 보기엔 마구잡이로 만든 것처럼 보이는, B급을 표방한 어처구니없는 프로그램이었지만 그 안엔
평범한 사람에 가까운 그들이,
영웅으로서의 자신들의 가능성을 발견하고,
오감/팀워크/내구력(?)을 기르는 훈련 등 영웅이 되기 위한 얼토당토않은 다양한 훈련들을 거쳐낸 후,
세상 속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찾아가 그들만의 영웅이 되어준다.
는 완벽하리만치 완성된 구조의 시나리오가 갖춰져 있었다!!
파일럿 프로그램은 한 편의 영화 같은 완성된 구조를 갖춘 작품이다. 그러한 작품성은, 내가 파일럿 프로그램을 특히 더 좋아하는 이유이다.
조권씨가 깝사인볼트로 등극했던 1회 대회부터, 매 명절마다 아이돌 스타 육상 선수권 대회를 챙겨봤다. 아육대는 명절을 기다리게 만들어 준 하나의 축제의 장이다. 누가 매주, 저 많은 아이돌들을 모아서 축제를 열 수 있을까? 어떤 방송사가 매주 저 많은 아이돌들의 스케줄을 조정하는 것과 높은 출연료 등을 감당할 수 있을까?
현실적 제약들이 만들어낸 아육대의 간헐적 편성은 아육대를 특별하게 만들어준다. 그것이 바로 '명절에만 볼 수 있는 프리미엄 콘텐츠!' 아육대가 가지는 브랜드 가치다.
신인 아이돌들은 자신들을 알리기 위해, 아육대가 갖는 그러한 브랜드 파워에 기댄다. 때문에, 누구보다 열심히 대회를 준비한다. 자주 찾아오는 기회가 아니기에 준비과정은 더욱 간절해진다. 그 결과, 신인 아이돌들이 우승 후 눈물짓는 모습은 더욱 진실되게 다가오고 한편의 감동적인 스토리가 된다. (그러한 장면에 짠한 BGM 하나만 깔아줘도 내 눈물샘이 터져버린다.)
아육대가 현실적 제약들을 넘어 정규편성되었다고 생각해보자. 상상만 해도 신나지만, 대회에서 우승한 후 눈물짓는 아이돌들의 모습이 우리들에게 더 극적으로 다가오지는 않았을 것이다. 또, 매주 육상 경기가 펼쳐지는 비슷한 장면을 지켜봐야 하는 시청자들의 피로감은 어찌 해결해야 할까.
파일럿 프로그램은 날이면 날마다 찾아오는 그런 프로그램이 아니다.
때문에 더욱 소듕하고 특별하다. 내가 파일럿 프로그램을 특히 더 좋아하는 이유이다.
하루 종일 TV가 쏟아낸 명절 특선 프로그램들 덕분에, 누군가에겐 길었고 누군가에겐 짧았을 이번 추석 명절이, 지루할 틈 없이 순식간에 흘러버렸다.
다시 출근이다. 루틴했던 삶 속에 주어졌던 짧았던 삐그덕거림이 끝났다.
즐거웠다 파일럿! 설에 다시 만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