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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요술램프 예미 Jan 19. 2017

삐에로는 웃고 있지

누군가 웃는 얼굴을 보며 화를 낼 때조차도

"넌 웃어야 예뻐~"


그때부터였다. 

웃고 싶지 않은데도 웃게 된 것이. 

웃고 있는 얼굴을 한 가면이 내 얼굴에 들러붙게 된 것이.


"넌 가만 있으면 화난 사람처럼 보여. B는 웃으면 깨기 때문에 가만히 있어야 하고, 너는 웃어야 한다니까"


그 전까지 난 웃고 싶을 때만 웃는 사람이었다. 웃긴 일이 있을 때만 웃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대학교 4학년 때 친구의 말은 웃고 싶지 않은데도 웃고 있는 삐에로 하나를 만들어 놓았다. 그 말이 왜 그렇게 나에게 영향력이 있었던 건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더 예뻐 보인다고 하니까 더 예뻐 보이고 싶었나보다.


웃지 않았기로 유명했던 중국 주나라의 포사와 같이 나는 평소엔 거의 웃지 않았다. 

특히, 친구가 내게 웃으라고 말했던 대학 4학년 시절엔 더더욱 그랬었다. 

아니, 원래는 웃음이 많았다. 조금만 웃겨도 웃는 아이였는데, 초등학교 3학년 때 담임 선생님이 내 웃음소리를 듣고선 누가 '으흐흐'하면서 웃냐고 나무라기에 웃는 걸로도 혼날 수 있다는 걸 처음 알게 되었다. 나중에 나처럼 저음의 목소리를 가진 친구가 초등학교 때 누가 아저씨처럼 웃느냐고 선생님한테 혼난 적이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보니 참 선생님들은 하나같이 특이하다고 웃고 말긴 했지만. 그런 사소하지만 사소하지 않은 경험부터 시작해서 어쩌면 나의 많은 상처의 역사들과 사람들에 대해 지치는 마음들을 모아서 웃지 않겠다는 선언과 다짐들을 만들어냈던 것 같다.


사람들에게 친근한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았다. 

다시 말하면, 나는 쉽게 보이고 싶지 않았었다. 

도도하고, 차가운 이미지는 그 당시에 내가 만들어 놓았을 것이다. 어려운 사람이 되어 내가 쳐놓은 선 하나만 넘어와도 금 밟았다고 죽음을 선포하기라도 할 요량으로. 그것은 철저하기도, 처절하기도 한 나의 방어기제의 발로였다. 


하지만 상처받지 않겠다는 의지보다, 예뻐 보이고 싶은 의지가 더 강했던 것인지 친구가 웃어야 예쁘다고 말한 그날 이후 나는 늘 웃고 있었다. 누군가 내게 화를 내는데도, 내가 혼이 나는 상황인데도 웃고 있었다. 지금 생각하니, 그것은 내게 형벌과도 같은 것이었다.



학교에서 근무할 때 교장이 10분 지각한 나에게 화를 내는데도 나는 그 상황이 너무 민망해서 웃음을 띤 얼굴로 야단을 맡고 있었다.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는 속담은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교장은 웃는 나를 보며 더 화를 냈다. 나라고 왜 그 상황에서 웃고만 있고 싶었겠는가. 학기 중도 아니고 방학 중에 10분 늦은 걸로 지금 다른 선생님들 있는데서 이게 뭐하는 짓이냐고 할 수도 있었다. 나는 그냥 평교사로 그 학교에서 근무하는 상황이 아니었기에, 충분히 함께 화를 낼 수도 있는 상황이었지만 그냥 센 여자로 보이고 싶지 않았었다. 뭐랄까. 나를 굉장히 여성스러운 사람인줄 아는 다른 선생님들의 기대감을 져버리고 싶지 않은 뭐 그런 기분이랄까.


큰 아들이 나에게 혼이 날 때면 아이도 어쩔줄 몰라 민망한 웃음을 지을 때가 있는데, 더 화가 났다. 엄마가 화를 내면 무서워해야 하는데 웃고 있으니 혼을 내는 사람 입장에선 자기의 면이 안 서는 것이었다. 그런 아들을 보고 있자니, 왜 그 교장이 내 웃는 얼굴에 더 화를 냈었던 건지 알 것 같았다. 민망해서 웃는 그 마음도 알겠고, 왜 웃는지도 알겠지만, 상대가 화를 낼 땐 자신을 우습게 여기는 것으로 오해할 수도 있으니 절대 웃지 말라고 아들에게 가르쳤는데, 그건 나 자신에게 해주고 싶었던 말이었다.


웃고 싶지 않았던 내 기분을 배반하는 나의 얼굴 근육들은 심지어 웃으면 안되는 상황에서도 웃고 있었던 적이 많았을 것이다. 어쩌면 그것은 상처받지 않으려는, 아니 더 정확히 말하자면 '나는 지금 하나도 상처받지 않고 있어요'를 보여주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나는 쿨한 사람이예요', 내지는 '나는 사실 성격이 참 좋답니다. 보기보다 착해요'를 보여주고 싶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친구의 한마디가 내게 씌어준 가면. 그때의 내 얼굴의 주체는 그 얼굴을 가진 내가 아니라, 내 얼굴을 바라보는 사람들이었다. 


나는 여전히 사람들에 의해, 사람들의 말 한마디에 의해, 사람들의 표정에 의해 쉽게 감정이 휩쓸리기도 한다. 주권을 잃은 국민마냥 나는 나를 잃고 삐에로가 되어 누군가 내 팔을 들어 올리면 팔을 올리고, 누군가 내 입을 양손으로 벌리면 그대로 있고야마는.


상처받지 않겠다 다짐하며 웃지 않았던 나는 이젠 상처받지 않으려고 웃고 있었다. 


"역시 쿨해~"

"여자 아니고 남자라니까~"


이런 말 한마디가 더 이상 내게 어떤 위안도 주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말이다. 자신의 감정을 숨기면서 사는 것이 결코 어른이 되는 것이 아니었다. 나는 나에게 맞지 않는 어른 역할을 꾸역꾸역 소화해내려 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게 드러내는 사람을 보면 어른답지 못하다고 생각하는 사회에 살고 있으니까.


이제는 내 얼굴을 내 마음에 돌려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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