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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요술램프 예미 Jan 09. 2019

남이 쏜 화살을 나에게 꽂지는 마

이제는 내 마음을 안아줘야할 때

“네가 그러니까 친구들한테 왕따를 당하는 거야.”     


초등학교 4학년 때쯤 소녀는 왕따를 당했다. 한참을 괴로워하다 아버지에게 털어놓자 소녀의 아버지는 그런 꼴을 당하는 것이 마치 소녀의 책임인 것처럼 말했다. 그건 너의 탓이라고. 네가 그렇게 생겨먹었기 때문에 네가 그런 꼴을 당한 거라고. 그 날의 그 말을 쓰레기통에 쳐 박다 못해 소각장에 넣고선 불태워버렸어야 했는데 소녀는 그러지 못 했다. 진짜 아버지의 말대로 자신이 이상해서, 자신이 잘못해서 그렇다고 생각했다. 아니, '힘에 대항한다는 것 자체가 못됐다'것을 어쩔 수 없이 받아들였다는 표현이 더 적확하다.      


힘 있는 친구가 모든 친구를 포섭해 소녀를 비롯한 친구들을 돌려가며 왕따를 시킬 때 다른 친구들은 그냥 그런 사실을 인정해버리고 말았다. 소녀는 그런 부당함을 모른 척하는 것은 정의롭지 못 한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세상은 힘없는 자의 분노와 반항을 좋아하지 않는다. 심지어 부모에게조차 그것은 받아들여지지 않았으니.     


소녀의 항거는 단 한 순간의 무모함에 지나지 않았고 결국 그에 굴복해 버렸다. 자기의 어떤 점이 왕따를 당하기에 충분한 이유였을까를 한 동안 찾기 시작했다. 그래, 급식비를 낼만한 돈도 없을 정도로 집이 가난하지. 아버지가 늙었고, 엄마는 곁에 없지. 여성스럽지 않고 선머슴같은 데다 머리는 삐죽삐죽 튀어나와 있기까지. 어쩌면 소녀의 지나친 명랑함이 그 친구에게는 밟아버리고 싶은 싹 같은 건 아니었을까.  

    

소녀는 이후에 힘 앞에 무릎을 꿇으며 고분고분해지는 법을 배웠다. 그리고 상대에게서 잘못의 이유를 찾는 대신 자기 자신에게서 그 이유를 찾았다. 그 친구를 미워하는 대신 친구의 눈에 들고자 행동했다. 친구가 선생님한테 혼이 나서 실망감을 안고 집으로 돌아가는 모습을 보며 뒤따라가 위로한 적도 있다. 친구에게 미움 받지 않는 친구가 되고 싶었다. 드디어 소녀는 완전히 항복 선언을 하고야 만 것이다.  

    

스스로 자신의 단점들을 찾아내서 소녀를 그렇게 대하는 친구에게 정당성을 부여했다. 그것만이 살아남는 방법인 것 같았다. 그래서일까. 남들이 하는 칭찬들이 소녀에게는 칭찬으로 들리지 않았다. 어른이 돼서도 이런 모습들은 꽤나 오랜 시간 지속됐는데, 칭찬을 순수하게 받아들이지 못 하고, 자신을 놀리거나 창피하게 할 목적으로 하는 이야기라고 오해하기도 했다.      



오늘날 홀로 죽어가는 수많은 10대들과 청년들에게서 그때 그 소녀의 모습을 자주 발견하곤 한다. 어린 시절 괴롭히는 사람을 공격할 힘도 없고 그로부터 도망갈 수도 없는 사람이 상황을 벗어나려 하기보다 오히려 순응해버리는 것처럼, 많은 학생들에게서 이런 무기력을 목격할 때가 잦아진다.      


오랜 시간 동안 누군가로부터 괴롭힘을 당한 학생들이 자살을 택하는 이유는 그 고통이 계속될 것만 같은 두려움 속에서 헤어 나오지 못해서이다. 동시에 자기 자신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행복하지 않은 거라는 잘못된 믿음을 갖기 때문이기도 하다. ‘나는 혼자’라는 좌절된 소속감을 보이면서, ‘미안하다, 나 때문에 네가 그런 고통을 당했다.’는 짐 된 의식을 보인다.


나 때문에 네가 힘들다는 짐 된 의식은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가져야 하는 것인데도, 오히려 피해자가 자기 때문에 가해자가 힘들었다는 의식을 갖게 돼버린다. 자신의 존재가 친구들을 행복하게 하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가해자들은 자신이 피해자를 미워하고 괴롭히는 것이 지극히 당연한 일이며 그에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해 더 많은 친구들을 포섭하고, 그러면서 자신의 감정을 마치 모두의 감정인 것처럼 피해 학생에게 떠넘기곤 한다. “모두가 너를 싫어한다, 너의 존재를 아무도 좋아하지 않는다.” 등등의 가장 날카로운 말로 상대의 심장을 도려낸다. 그런 말을 들은 피해자는 그것이 잘못된 말이라고 생각하기 보다 그 말이 진실인 것처럼 받아들이게 된다.  이런 짐 된 의식을 껴안고 많은 학생들이 스러져갔다.   


한 쪽 뺨을 맞았다면 다른 쪽 뺨을 불쑥 내밀 것이 아니라 그 폭력의 잔인함을 내 것으로 만들지 말아야 한다. 다른 사람에게 무참히 짓밟혀 본 적이 있는 사람은 더더욱 그래야만 한다. 나에 대한 동정심과 연민의 정을 결코 놓치지 않고 누군가 나에게 또 그런 폭력을 가하는 것을 완강히 거부해야만 한다. 남이 쏜 화살은 뽑아서 다시 그에게 돌려주거나 당당히 땅바닥에 꽂아버려야만 한다. 그래야 내 영혼에 피를 돌게 하고, 나를 살릴 수 있다.


이 세상에 자신이 두들겨 맞아야 변화될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남에게 폭력을 가하는 사람조차 자신이 맞아야지만 정신을 차릴 거라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기에 남이 나에게 가하는 폭력에 단 한 순간에라도 자책하지 말아야 한다. 언어로든, 물리적으로든 폭력을 가하는 사람은 자신의 행위에 상당한 정당성을 부여한다. 상대의 행위 때문이라고, 상대가 나를 자극했기 때문이라고, 상대가 그럴 만한 행동을 했기 때문이라고. 그러면서 자기가 당하는 폭력에 대해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면서 자기의 신경에 거슬리는 상대의 표현 하나하나에도 발끈거린다.     


“표현을 그렇게 하면 안 되지!”


이런 말을 하는 사람들이 자주 있다. 내가 자기 자식도 아닌데 뭘 그렇게 남을 가르치려고 함부로 달려드는지, 다른 사람이 왜 자신의 마음에 드는 말과 행동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도대체 알 수 없다. 자신이 '옳음'의 중심이 아니며, 자기만의 기준이 절대적인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꼭 이런 이야기를 쏟아내는 사람들은 세상의 중심에 본인이 있다고 외치고 싶은 모양이다. 


왕따를 가하는 학생들도 똑같다. 자신들의 행위가 얼마나 비열하고 잔인한지는 인정하지 않으면서 당하는 학생이 당할 만한 짓을 했다고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스스로를 가해자라고 인식하지 않는다. 폭력의 원인을 비뚤어진 자신의 인격에서 찾으려 하지 않고 애먼 데서 찾기 때문이다.     


우리는 얼마나 한참을 해석되지 않는 폭력을 참고 지냈던가. 자신의 폭력성에, 타인의 폭력성에 이토록 둔감한 시절이 있었던가. 변해야 할 것은 늘 그대로고, 변하지 말아야 할 것들은 참 빨리도 변한다.     



“남의 화살과도 같은 말 앞에서 자책하지 말아요.
그는 그의 세상의 중심일 뿐, 내 세상의 중심은 아니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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