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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요술램프 예미 Jan 08. 2019

시간이 약이라는 말은 진짜일까

우리의 그늘에 대하여

시간이 약이라는 말은 고통이 끝나지 않을 것에 대한 인간의 두려움이 집약되고 농축된 말이라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애써 고통을 부정하려는 것이 아니라, 살기 위한 몸부림 같은 것. 그렇게라도 최면을 걸지 않으면 지금 당장 살 수 없을 것 같아 미래의 나에게 주는 적당한 위로라고.


삶을 종이 위에 옮겨놓을 때 우리에게 가까운 색은 검은색일까, 흰색일까. 글은 시적허용이든 뭐든 모순조차도 아름다운데, 삶이란 모순이 많으면 많을수록 오늘을 과거 속에 묶어두는 결과를 초래하고야 만다. 읽어서 해석되지 않는 시처럼 돼버리기 일쑤다. 과거가 아무리 의미 있었던 시간이었다고 자위해본들, 내게 왜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 도무지 이해조차 되지 않아 난독증 환자만 될 뿐이다.      


아픈 언니가 있었다. 아직 시집도 가지 않았는데 덜컥 암에 걸려버리고 말았다. 그래도 특유의 긍정적인 마인드로 잘 견뎌냈다. 암 환자는 5년 동안 암이 재발하지 않으면 완치 판정을 받는다. 다행이 5년이 무사히 흘러간 듯 했다. 그런데 전혀 엉뚱한 곳에서 암세포가 또다시 자라고 있었다. 그때 교회 집사님이 그녀에게 이런 말을 했다.     


“지금 겪는 시련은 하나님이 더 좋은 것을 주시려고 하는 거야. 더 강하게 하시려고”     


그 입을 틀어막아 버리고 싶었다. 더 좋은 건 필요도 없으니 당신이 믿는 대로 그 따위 시련은 당신이나 가지라고 말하고 싶었다. 그렇게 강한 사람이 되는 게 좋다면 당신이나 실컷 아프라고 말하고 싶었다. 그런 믿음으로 자신에게 닥치는 불행도 참 잘 견뎌낼 테니 말이다.      



신을 믿든, 아니든 시련은 그냥 시련일 뿐이다. 고통도 그냥 고통일 뿐이다. 그 병이 내 병이 되면 어떻게 나한테 이런 시련을 줄 수 있느냐고 행패를 부릴 것이 뻔하면서, 남의 고통과 시련은 축복이라고 말하는 마음의 기저에는 내가 아니라 다행이라는 안도감이 뒤섞여 있는 것은 아닌가. 그래, 그렇게 하나님을 잘 믿던 어느 청년도 서른 세 살에 죽고야 말았다. 믿음이 깊은 어떤 이는 그녀를 보며 일찍 천국에 가서 참 좋겠다고 말하려나.  

    

마음이 아픈 사람들을 보면서 사람들은 흔히들 그 사람의 의지가 약해서라고 말한다. 외로워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어찌 외로울 수 있냐고 말한다. 신앙이 있는데 왜 심리학으로 사람을 고치려고 하느냐고 말한다. 신에게 자신의 고통을 고해야지, 왜 사람에게 말하느냐고 말한다. 그 말은 몸이 아플 때 병원에 가지 말고 신앙의 힘으로 나으라는 말과 똑같다. 한 번도 아파보지 않은 사람들의 무식과 무지다.      


사람들은 상처에서 꽃이 필거라고 믿고 싶어하는 눈치다. 그런 기적은 절대 일어나지 않는다. 죽은 것에서 살아있는 것을 보려고 한다. 데인 상처에 연고를 발라봐야 거기에서 새 살은 돋아나지 않는다. 데인 상처는 칼이나 촘촘한 바늘을 수백 번 찔러대서 피가 철철 날 때까지 긁어내거나, 다른 쪽 살을 덧대는 것밖에 방법이 없다. 그러니 우리의 상처를 멀쩡한 살처럼 보이게 하려면 기억을 지워주는 약이라도 먹든가, 새로운 기억과 감정으로 덮어버린 채 이제는 보이지 않는다고 자위할 수밖에.      


힘든 기억은 나를 병들게 할 뿐, 나를 자라게 하지 않는다. 사람들의 몰지각한 말과 행위는 상처로 남을 뿐,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서 나는 온 힘을 다해 노력해야 한다. 지나간 메마른 감정은 절대 풀리지 않은 실타래의 그것보다 더 질기게 묶여있어 잘라내는 것 외에는 방도가 없다. 상처가 우리를 강하게 만들 거라는 명제를 순순하게 받아들인 당신은 여전히 나약한 자신을 보며 실패했다고 느끼게 될 것이다. 살아있을 가치가 없다는 결론에 이를지도 모른다.      



우리는 고통에서 어떤 의미를 찾으려는 시도를 멈춰야 한다. 그것이 이렇게 되려고 그랬던 거구나 깨닫게 되는 건 먼 훗날의 내 몫이다. 끝끝내 그런 깨달음을 얻지 못하는 결과가 초래되기도 한다. 그러니 현실의 나는 고통에 최대한 아파하며 하소연하고 징징대야 한다. 덮어버릴수록, 어른인 척 참을수록 고통은 나를 잡아먹으려 있는 힘껏 입을 벌리고 있을 것이다.      


억지스러운 인정이 어떤 순간에 우리를 해방시킬 수 있었던가. 나와의 타협으로 결국은 시간 속에 상처를 숨기든, 인정을 하든 그것은 내가 알아서 할 일이지, 남이 나에게 이러쿵저러쿵 강요하는 것 자체가 또 다른 상처일 뿐. ‘너 사실은 아프잖아’가 아니라, ‘너 아프지 않아야 하잖아’가 된다면 그것만큼 강압적인 말이 있을까. 아픈 사람에게 아플 기회조차 주지 않고, 철저히 그 시간을 차단해버릴 권리는 아무에게도 없다. 그가 나에게 아프다고 징징댈까봐 두려워 선수치는 것만 같으니. 그런 걸로 나한테 징징대지 말라고. 나는 네 아픔을 받아들일 준비도, 그럴 만한 여유도 없으니, 제발 아프지 않다고 시련이 괜찮다고 말하라는 읍소 같다.      


몸이 아프면 그래도 희망은 있다. 시간이 지나면 언젠가는 낫겠지, 좀 더 기술이 좋아지지는 않을까 기대도 하게 된다. 하지만 오늘의 의료기술이 많은 사람들의 그런 기대를 배신해버리는 것을 아주 자주 경험하지 않았던가. 하물며 우리의 감정을 온전히 치유해줄, 더 낫게 만들어줄 어떤 기술력도 확인해 보지 못 했다. 단순히 세상과 사람들은 시간이 흘러가면 점차 둔화되는 기억력에 의존하라고만 말한다. 상처 앞에서 옅어지는 기억력이라는 것은 없다. 마지막 순간까지도 해결되지 않는 상처를 끌어안은 채 어린 아이인 채로 죽어가는 어른들을 여럿 보아왔다.       


상처는 덮어버린다고 낫는 것이 아니다. 들추어보면 상처는 그 자리에 그대로 앉아서 울고 있다. 시간이 약이 될 수 있다면 애초에 아무도 아플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시간이 약이었다면 아무도 정신병에 시달리지 않았을 것이고, 불안장애와 공황장애 등의 장애에 걸리지 않았을 것이다. 세상에 시간만큼 제 역할을 다 해 흘러가는 것도 없으니.  의미를 찾으려고 할수록 고통은 더 크게 느껴진다. 잠잠해야 할 때는 그저 잠잠히 살아내는 것이 방법이다. 분노가 일 때는 그저 분노하는 것이, 슬픔이 밀려올 때는 그저 통곡하는 것이 방법이다.    


내 감정을 적절한 순간에 인정받아야 할 기회가 차단된 채, 괜찮은 척 해야만 했기 때문에 회복의 절대적 기회를 놓쳐버린 사람들이 수두룩하다. 징징댈 수 있다는 것, 징징댈 사람이 있다는 것은 그래서 큰 행운이다. 상처 앞에서 아무도 비웃지 않는 공감, 그냥 울어도 된다는 허락을 우리는 시간이라는 추상적인 개념 뒤로 숨겨 버렸다. 나도 너에게, 너도 나에게 아는 체 하지 않기로 작정하면서.


우리를 낫게 하는 것은 때에 맞는 환경과 다른 사람의 사랑이 잘 합쳐졌을 때나 가능하다. 사랑 한번 준 적 없는 사람이 의지가 약하다며 남을 비난하는 것 자체가 사랑의 결핍을 증거하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 자신은 그런 시련 한번 겪어보지 않은 사람이 남의 시련에 대해 쉽게 얘기하는 것도 코끼리 코만 만져보고선 코끼리를 묘사하는 것과 같다. 그런 모순 속에서는 그 어떤 상처도 회복될 길은 없다.      


“가만히 내버려둔 상처는 어느 순간 불쑥 고개를 내밀 거예요.
응급 처치 시간을 놓쳐버린 탓으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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