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요술램프 예미 Mar 31. 2016

비애의 유산

어릴 적 기억의 역습

태어난 순간부터 비애만을 내 꼬리에 붙여놓은 나의 아비는

빛을 쪼갠 후 그 자리에 어둠 한 줄기 심어놓고

마른나무처럼 말라죽어버린 후

또다시 그 자리에 분노 한 줄기 남겨놓았다.     


다시는 살아날 수 없을 것 같았던

메마른 몸뚱아리는 그 분노를 먹고 자라나

이제는 거대해질 대로 거대해진 괴물이 되어버렸다.    

 

정리하기 싫어 쌓아놓은 짐짝처럼

마음속에 꼬깃꼬깃 구겨진 채로 자리 잡은

어릴 적 기억들이 터져 나온다.

마치 판도라의 상자 속에서 터져 나왔던 불행들처럼.     


아담을 꾀었던 뱀이 똬리를 틀고 앉아 오늘도 나를 노려본다.

너는 뱀이었다가, 사자였다가, 순한 양이었다가 다시 뱀이 된다.

내 귓가를 속삭이며 독을 내뿜고

그 독은 이윽고 내 꼬리에서 심장으로 옮겨 간다.     


잡아먹히지 않으려 도망 다니던 나는

스스로 늙은 비애가 된 채, 

물기 하나 없는 마음을 그 앞에 놓아두고 통곡한다.     


소리 없이 통곡한다.

그 노인을 닮은 채.     




어제에 이어지는 시라고 할 수 있겠네요. 얼마 전에 지었던 시였는데, 몇 줄 더 넣었어요.


어제 어떤 뉴스를 봤어요. 어느 엄마가 다른 남자와 가정을 꾸리면서 아들 둘을 자기 동생한테 맡겼는데, 그 아들들이 엄마가 보고 싶다며, 엄마를 찾아갔대요. 큰 아들은 중학교 1학년이고, 둘째 아들은 초등학생이라고 하더군요. 자신을 찾아왔던 아이들에게 왜 찾아왔냐며 다시는 찾아오지 말라고 엄마는 칼을 휘둘렀다고 했어요. 큰 아들이 칼에 찔리고, 작은 아들은 그것을 옆에서 지켜봤다고 해요. 그 애들이 온전히 제정신으로 살아갈 수 있을까 순간 걱정이 밀려왔어요. 제발 그 애들을 돌보는 삼촌이 엄마 대신 사랑을 많이 주기를, 나쁜 길로 들어서지 말기를 조용히 빌었죠.


제 어린 시간이 떠올랐어요. 어제의 시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저 역시 그랬거든요. 한 번쯤은 긴 글을 통해 고백하는 시간이 있었으면 해요.


어릴 적 아픈 기억에서 벗어나는 건 쉽지가 않죠. 내 아버지는 벌써 10년도 전에 하늘로 갔지만, 아직도 내 옆에 살고 있는 느낌이에요. 그때 이제 더 이상 아빠와 함께 하는 삶을 살지 않아도 되어서 한 편으로는 후련했는데, 아직도 함께 살고 있는 느낌이 들 때면 문득 화가 밀려올 때가 있어요.


꼬리가 귀찮아서 떼 버리고 싶은데, 찰싹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는 듯한 느낌이랄까요.


사실, 이 시는 한 번쯤은 어둡고 음침한 시를 지어야 할 것 같아서 처음으로 그런 느낌의 시를 짓는답시고 지었던 거예요. 신춘문예 당선작들을 보다가 무슨 말인지, 무슨 뜻이지도 모르겠는 단어로만 연결돼 있는 음침한 시들을 읽은 적이 있어요. 그런 시들을 보며 수준이 정말 높다고 말하는 심사위원들의 평론을 읽고선 원래 시는 그렇게 짓는 건가 생각하며 시인의 지적 허영을 따라 해 본 거랄까요.


내가 짓는 시에서까지 늙은 아비와 함께 살고 싶지는 않았는데, 내 아픈 역사의 한 편을 또 이렇게 남깁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들꽃들에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