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상담실에 올 때, 저마다 여러 가지 고민을 안고 온다. 그중에서 가장 많이 지켜보게 되는 것은 자기에 대한 양가적인 감정들과 혼란함이다. 타인에 대한 미움과 분노는 오히려 단순하다. 나랑 상관없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어떠한 감정까지 느낄 필요도 없다. 그저 멀리하거나 형식적으로 대하면 그만이다. 하지만 나라는 존재는 버릴 수도 없고, 마냥 미워하기도 애처롭다. 대부분 자기를 바라보는 눈빛들이 흔들리는 사람들 마음의 기저에는 가족에 대한 양가적이고도 혼란한 인식이 깔려있는 경우가 많다. 나를 미워하거나 나를 싫어하는 상태에서 우리는 태어난 것이 아니라, 자라왔던 환경에서 나를 그렇게 바라봐왔던 가족의 눈빛이 나에게로 반사된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처음 부모가 된 사람들은 자녀가 건강하게 잘 크기만 해도 행복할 거라고 말하고 실제로도 그렇게 믿고 다짐도 한다. 그러다가 아이는 웬만해서는 건강하게 자라고 자신들의 유일했던 소망은 채워졌기 때문에 다른 소망들이 생긴다. 그리고 정말 건강하기만 한 자녀들을 보며 실망하기도 한다. 이는 아기 때의 가장 큰 발달과업은 생존에 있고, 이후에 성격 형성이나 사회적 적응에 맞게 발달과업이 변화됨에 따라 부모의 기대도 다르게 변하는 당연한 귀결이기도 하다. 기대와 소망이 달라지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소망과 실망은 부정적인 평가와 기대의 언어 사이를 오간다는 데 있다. 사실대로의 상황이나 사건이 그려지는 것이 아니라 사실과 달리 부모의 지극히 주관적인 견해와 해석에 의해 사실은 다르게 왜곡되거나 부정되기도 하고, 자녀에 대한 자아상이 긍정과 부정의 극단을 오가기도 한다. 이는 먼 훗날 그대로 자녀의 것이 된다.
“저는 아빠를 닮아서 머리가 나쁘기 때문에 남들보다 공부를 더 열심히 해야 한다는 말을 어렸을 때부터 엄마한테 계속해서 들었어요. 그래서 머리가 나쁜 아빠를 미워하기도 했어요. 그리고 엄마는 저한테 야물지 못해서 잘하는 게 별로 없다는 이야기도 했었고, 이모들은 사회성이 떨어져서 사회생활은 어떻게 할래? 이런 말도 했었어요. 그래서 회사 생활하기 전에 너무 두려웠고, 지금도 남들은 다 할 수 있는 일을 나만 이렇게 못하나 자괴감이 들어요.”
최근에 만난 내담자는 못나 보이는 자신에 대해 괴로운 마음이 가득했다. 엄마와 이모들은 아이가 노력하기를, 조금 더 관계에서 적극적이기를 바랐을 것이다. 남편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가 자녀에게 전이되면서 자녀에게서 보이는 남편의 모습을 부정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을지 모른다. 내담자는 실제로 학교 다닐 때 늘 공부를 잘 했고, 고등학교 때는 전교 5등 안에 들 정도로 성적도 우수하여 좋은 대학에 합격했다. 이후에는 유수의 직장을 한 번에 붙었고 직장에서 치른 시험에서도 1등을 하면서 수백만 원에 달하는 노트북을 그 부상으로 받기도 했다. 물론 엄마와 이모들은 자신들의 압박이 있었기에 아이가 그나마도 한 것이라고 이야기할지도 모르겠다. 그러한 압박에 성장할 만한 아이였다면 다른 긍정적인 말과 방법의 제시로도 아이는 성장하였을 것이다. 내담자는 충실하게 삶을 살아왔지만, 자신이 자주 들어왔던 모습에 부합하는 증거는 크게 받아들였고, 그에 반하는 것은 어쩌다 이룬 것이나 별것 아닌 것으로 생각했다. 자기가 공부를 잘 했던 것은 누구나 오래 앉아있으면 잘 하는 것으로, 1등을 해서 상품을 받은 것은 아무도 공부를 하지 않아서 자신에게 온 행운이라고 말했다. 언어화된 나에 대한 이미지는 다른 경험을 해도 잘 깨지지 않는다. 부정적 자기 스키마(인지적 틀)를가진 사람은 자신에 대해 부정적인 믿음을 중심으로 정보를 해석하고, 긍정적인 정보는 무시하거나 왜곡한다.
이는 계속해서 긍정적인 피드백을 받았던 사람에게서도 비슷하게 나타난다. ‘항상 어른스럽다, 혼자서도 무슨 일이든 잘 한다’는 평가를 받았던 한 내담자는 이런 평가와 동떨어진 자기의 모습을 마주하고선 우울장애를 겪게 되었다. 언제나 자신감 넘치던 자기에 대한 이미지가 깨지는 순간, 그와 전혀 다른 모습을 보이는 자기를 인정하고 싶지가 않았던 데서 우울은 비롯되었다. 사람들은 자신이 겉으로 보이는 모습, 즉 ‘가면’과 자신의 진짜 모습을 너무 똑같이 여기곤 한다. 그런데 그 ‘가면’과 실제 모습 사이에 큰 차이가 있을 때, 마음이 무너지고 우울해질 수 있다. 또 어떤 순간에는 ‘내 존재가 의미 없고 가치 없구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 깊은 슬픔에 빠지기도 한다. 사람들은 자신에 대해 단단하고 긍정적인 이미지를 오래도록 믿는다. 그래서 그 이미지와 다른 부정적인 모습이 조금이라도 나타나면 무의식적으로 숨기거나, 애써 보지 않으려 한다. 끝끝내 감추려고 했던, 마주하고 싶지 않았던 모습을 마주하여 그것이 내 모습이라고 인정해야 하는 순간 자신의 가치는 땅에 떨어지고 더는 에너지를 낼 수 없어 앓게 되는 것이다.
어린 시절 누군가에 의해 규명된 나는 살아가면서 규명된 나에 걸맞은 내가 되려고 애쓰거나 어떠한 증거가 나타나도 규명된 나를 바꾸기를 거부한다. 하나의 확고하고도 견고한 세계가 된다. 그 세계가 분명하면 할수록 깨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들거나 깨져야 하는 순간이 오면 아주 강력한 방어기제가 작동하여 부적응성은 더 깊어진다. 그것이 우리가 흔히 일컫는 불안장애, 우울장애, 공황장애로 대변되는 마음의 병인 것이다. 나를 변할 수 없는 존재로 만들면 만들수록 우리의 적응력과 유연성은 떨어지는데 요즘 유행하는 MBTI는 나를 유연하지 못한 시각으로 보게 하는 데 일조한다. 심지어 상담을 전공한 한 동료가 자신의 MBTI 유형을 언급하면서 자기는 원래 어떤 성과를 달성하는 사람이 아니라 그저 호기심만 채우는 사람이며, 인식된 자기 자신에게서 절대로 빠져나올 생각이 없음을 말한 적이 있다. 어렴풋한 자기를 조금이나마 인식하고 부족한 점을 채우기 위한 목적으로 MBTI를 하는 것이 아닌, 자기를 틀 안에 가둔 후 굳히기를 하거나 체념하는 것은 재미로 별자리 운세를 보는 것보다 더 나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누구에게나 이성적인 면과 감정적인 면이 공존한다. 어떨 때는 계획을 잘 세우다가도 어떨 때는 즉흥적으로 행동할 수도 있다. MBTI를 해 본 사람은 모두 알겠지만, 모든 점수가 한쪽으로 완벽하게 기울어져 100점이 나오지 않는다. 특정한 점수가 더 많이 나올 뿐이다. 그런데 나머지 한쪽의 점수는 무시한 채, 더 많이 나온 점수를 기반으로 나는 이성적인 사람, 나는 외향적인 사람 이렇게 평가할 수 있을까. 나를 어떠한 존재라고 정의내리는 순간 그 정의로부터 우리는 자유로울 수 없으며 흘러가지 못한다. 간혹 학자들 사이에서도 사람의 성격은 변한다, 변하지 않는다로 서로 토론을 하기도 한다. 나는 사람의 성격은 얼마든지 변할 수 있다고 강력하게 믿는다. 그리고 그렇게 믿는 것이 나뿐만 아니라 인간을 구원할 수 있다고도 생각한다. 변하지 않는 존재라고 생각하는 것에 어떠한 의지와 노력이 깃들 수 있을까. 그리고 상담사의 입장에서 인간은 변할 수 없는 존재라고 인식한다면 인간의 치유와 성장을 어떻게 믿고 상담에 임할 수 있을까.
인간은 흘러가는 존재이며, 인간의 실존성은 언어를 뛰어넘어 존재한다. 내가 나를 ‘용기 있는 사람’ 혹은 ‘비겁한 사람’으로 정의 내릴지라도 나의 용기와 비겁함을 정확하게 묘사할 수도, 수치화할 수도 없다. 그리고 나는 항상 용기 있는 사람이 아니라, 대체로 용기 있는 사람일 수도 있으며 때로는 힘 앞에 굴복하거나 비굴할 수도 있지만 그러한 경험이 극히 미미하거나 진짜 용기를 내야 할 상황에 맞닥뜨리지 못했을 수도 있다. 극단의 순간에 용기가 없을지라도 딱히 그러한 사실에 비난받아야 마땅한 것도 아니다. 우리가 ‘항상 용감해야 한다’고 자신을 정의하면, 정말 위험한 순간에도 용기를 내야만 한다는 부담이 생긴다. 그런데 만약 그 순간 너무 두려워서 용기를 내지 못했다면, 그때의 나는 단지 한 번 용기를 잃었을 뿐인데도 비겁한 사람이라고 생각해야 할까? 사실 그런 생각은 나 자신을 너무 엄격하게 판단하는 것이고, 그런 마음을 거부하지 않으면 결국 나와 멀어질 수밖에 없다. 적응적이고 유연한 마음이란 나의 여러 모습을 다양한 시각으로 바라보고 내가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다는 것을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다양한 자아 사이의 공간에 서 있을 수 있는 능력이다. 무엇보다 아직 오지 않은 미래의 나를 현재의 내가 규정하는 것도 자유롭지 않고 희망적이지도 않다. 우리가 인식하는 나는 한 시점에서 경험하는 나일 뿐이며, 아무리 정교한 언어로 나를 정의할지라도 언어는 시시각각의 경험을 모두 담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