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감정들 가운데 유독 우울은 불명예를 안고 있다. 우울은 정서적 불안정을 상징하는 대명사가 되었다. 그래서 우울을 느끼는 자신의 모습을 추방하고자 애쓴다. 밝은 사람으로 보이고자 타인에게 우울을 감추기도 한다. 의지가 없어 우울을 느끼는 거라며 타인을 타박하기도 한다. 낙인감을 느낀 사람은 상담을 받는다거나 병원을 찾는 것을 꺼리기도 한다. 어린 아이들도 우울증에 걸려 약을 먹는 시대이다. 그런데 나는 의문이 든다. 우울은 병원을 찾아서라도, 약을 먹어서라도 치료해야 하는 병인 걸까? 한창 사춘기를 지나고 있는 학생들은 떨어진는 낙엽에도 슬퍼서 눈물을 흘릴 수 있는 나이인데, 우울증이라며 굳이 약을 먹여서라도 사춘기의 혼란함을 느끼지 않게 해야하는 것일까?
최근에 한 중년 여성이 상담실을 찾았다. 고등학생 자녀가 우울증 진단을 받아 약을 먹고 있는 중인데, 자녀가 너무 우울해하니까 본인마저 우울해서 힘들다는 것이었다. 학교에서 학원으로 왔다 갔다 하면서 하루종일 공부하다가 온갖 피로를 갖고 들어온 집안에서까지 여고생은 생기발랄해야 하는 것인가. 친구들 비위를 맞추고 정글에서 살아남고자 애쓰고, 집에서는 나 때문에 엄마가 우울해하니까 또 애써야 한다면 아이는 도대체 어디에서 숨을 쉴 수 있을까. 아이는 집에서만큼은 우울하게 있고 싶다고 했다. 그리고 친구들은 자기가 우울한지 모른다고 했다. 오직 가족들만 알고 있다고 했다. 사회적 가면을 벗고 가장 자연의 상태 그대로 있어도 되는 곳이 가정이니까. 하지만 이제 아이는 자기 때문에 우울하다며 정신의학과에 자신을 데려간 엄마를 위해서 우울증 약을 먹고 있다.
중학교 3학년 때 한창 사춘기를 겪었다. 나는 그때 창밖을 보다가도, 교과서를 보다가도 눈물을 흘렸다. 대학생이었을 무렵엔 서울 생활에 적응하지 못해 우울하기만 했다. 좋아하는 오빠가 나한테 관심이 없을 때도 우울했고, 첫사랑이 갑자기 결혼했을 때도 우울했다. 고시생이었던 시절 공부가 제대로 안 돼서 우울했고, 직장을 다닐 때는 직장 사람들을 보는 것만으로도 우울했다. 결혼을 해서 아이를 키우면서는 나 혼자서만 단절된 것 같은 느낌에 극도로 우울했다. 아마 우울을 느꼈던 어느 때라도 정신과에 갔더라면 나도 우울증 진단을 받았을 테고, 우울증 약을 복용하라는 이야기를 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우울한 내가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 우울함이 밀려올 때마다 우울한 것이 너무나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공부만 해야 하는 시기에는 앞날이 불투명하기만 했고, 집은 가난했으며 아버지는 사고만 쳐대던 그때 우울하지 않는 게 오히려 이상한 일이었다. 거지같은 인간들을 매일 직장해서 봐야 하고 말을 섞어야 하는데 또 그 거지같은 인간들이 참견하고 뒷담화를 한다는 건 그냥 우울한 일임이 당연하지 않나. 어떡하든 먹고 살아야 하는데 돈을 못 버는 것도, 온종일 집안에서 말 못하는 아이만 바라보는 것도 모두 우울할 만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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