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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고 싶었던 마음과 살고 싶었던 마음

by 요술램프 예미

나는 내가 너무 불쌍해서 매일 죽고 싶었다. 나는 내가 너무 불쌍해서 차마 죽지 못했다. 죽고 싶었던 마음도, 살고 싶었던 마음도 결국 같은 이유 때문이었다. 어떨 때는 너무 고통스러워 엉엉 소리 내어 울었고, 또 어떨 때는 어느 정도로 소리 내서 울어야 고통을 표현할 수 있을지 몰라 차마 울지 못했다. 분명한 건, 죽고 싶을 땐 모든 것이 죽을 이유였고, 살고 싶을 땐 또 모든 것이 살아야 할 이유였다는 것이다.


처음으로 자살을 떠올려본 것은 초등학교 3학년 때였다. 심리학적으로도 그 정도의 나이가 되면 자살에 대한 관념이 생길 수 있다고 본다. 자아의 개념이 발달하고 죽음을 해결책으로 상상할 수 있을 만큼의 인지적인 발달도 있는 시기이기 때문이다. 단지, 죽고 싶다는 관념 속에 머무른 것만이 아니라, 구체적인 방법도 생각해봤었다. 커터칼을 손에 대보기도 하면서 실행할까 말까를 한참 고민하기도 했다. 더 힘들었던 것은 어떤 누구에게도 그런 마음을 말할 수 없었다는 거였다. 아이들에게 가장 믿고 의지할 대상이 부모이고, 어떤 고민이나 상처가 있을 때 이야기할 대상도 부모이지만, 부모가 그 원인의 제공자일 때는 말할 만한 절대적 자원이 사라져버리는 것이다.


아버지는 한번 화가 나면 밥상을 뒤엎고, 칼을 들고 위협하는 일이 잦았다. 그 앞에서 살려달라고 비는 것만이 어린 내가 할 수 있는 일이었다. 막아주고 보호해 줄 엄마는 힘이 없었다. 말려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때 엄마는 모른 척했다. 엄마가 나를 대신해 맞아주었으면 좋겠다고 기대했지만, 엄마도 맞는 건 무섭고 힘들었을 것이다. 신에게 기도도 해봤다. 제발 도와달라고 기도했지만, 신은 침묵의 마왕이다. 연락두절, 읽씹, 응답불가. ‘카톡 안 읽고 잠수탄 전남친’ 같았다. 무력했다. 아버지가 나를 죽이기 전에 내가 먼저 죽는 게 덜 고통스러운 일 같았다. 무엇보다 살려달라고 비는 건 전혀 존엄하지 않았다. 아버지에게든, 신에게든. 존엄하지 못한 삶보다는 스스로 선택한 죽음이 더 존엄하지 않을까. 하지만 나는 이내 생각했다. 이 세상에 내가 살았다는 걸, 그리고 내가 그토록 고통스럽게 죽었다는 걸 아무도 모를 거라는 생각에 다다르자 갑자기 억울했다. 멋진 여성으로서, 또 멋진 사람으로서 살아볼 기회마저 상실할지도 모른다는 것도 억울했다. 억울해서 죽지 못했다. 어쩌면, 죽고 싶지 않았던 마음이 더 컸기에 억울한 이유들을 생각해낸 걸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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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조우관. "상처의 흔적들을 유배시키기 위해, 무용이 유용이 될 때까지 쓰고 또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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