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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umbrella Oct 01. 2020

걷고 또 걷고 걸었습니다.

제주도 여행기.

지난주 제주도에 갔습니다. 충동적인 여행이었습니다. 일주일 전에 비행기표를 예매하고, 하루 전에 숙소를 잡았습니다. 여행의 목적은 하나였습니다. '걷자.' 걷는 걸 좋아합니다. 지금 살고 있는 동네로 이사 왔을 때도 가장 좋았던 것이 조금만 내려가면 밑에 걷기 좋은 천이 있다는 거였습니다. 뒤에는 걷기 좋은, 사실 드라이브 코스로 유명한, 산도 있습니다. 언덕 위에 있다는 것 빼고는 걷기 참 좋은 동네입니다.


왜 걷는 걸 좋아하나 생각해봤더니, 아무 이유가 없는 것 같습니다. 그만큼 걷기를 진짜 좋아한다는 것으로 해석해도 될까요? 굳이 이유를 설명하자면 노래 듣는 걸 좋아합니다. 하지만 공부를 하거나 대화를 할 때 노래 가사가 항상 방해거리가 됩니다. 걸을 때는 노래가 방해가 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속도를 조절해주고, 즐거움을 더해줍니다. 사색을 채워주고 생각을 다듬어 줍니다.


그래서 제주도를 갈 때도 다른 건 다 못해도 올레길 한 코스는 걸어보자고 다짐했습니다. 무슨 코스를 걸을까 고민하며 인터넷을 뒤졌습니다. 20코스의 경치가 참 이쁘더라고요. 20코스를 걷자고 다짐했습니다. 3박 4일 중 이틀을 20코스 시작 지점과 가까운 월정리에서 묵었습니다.


차도 없고, 면허도 없어 뚜벅이로 제주 첫날을 돌아다녔는데, 너무 더워서 괴로웠습니다. 올레길 20코스는 난이도가 중상 정도에, 17km가 넘는 거리여서 과연 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10km 남짓의 21코스를 걷기로 했습니다.


경치가 좋진 않았습니다. 현무암 돌담길만 실컷 봤습니다. 풍경의 1/3은 돌담길과 논밭, 1/3은 해안가, 1/3은 나무였습니다. 돌담길이 끝나고 감격스러운 기분으로 해안길을 걸었습니다. 태양빛이 뜨거웠고, 도로에는 해안가 드라이브를 즐기는 차들이 있었지만, 그래도 이 길을 걷고 있는 건 '나 혼자'라는 생각에 좋았습니다. 애초에 이 여행의 목적이, 이렇게 우울하게 혼자 있을 바에야 더 적극적으로 '혼자'가 되자.였거든요.


해안길을 걷는데 저 멀리 산인지 오름인지 분간이 안 가는 언덕이 보였습니다. 설마 내가 저길 가겠어?라는 마음으로 계속 걸었습니다. 결국 길을 안내해주는 조랑말 표식이 결국 그 오름을 가리키더군요. 지미 오름이었습니다.


오름이라더니. 산이었습니다. 3km 같은 1km를 올랐습니다. 제 뒤에 같은 코스를 걷는 모녀가 있었는데 그들을 먼저 보냈습니다. 올레길은 50m마다 가는 길이 리본으로 표시가 되어있는데 그 리본이 나올 때마다 쉬었던 것 같습니다.


오르면서 생각했습니다. 그만 돌아갈까. 내가 여기서 돌아간다고 해도 나보고 포기했다고, 실패했다고 나무랄 사람이 없습니다. 그래도 마음을 다잡았습니다. 힘든 마음을 지워내는 데 고된 일만큼 효과적인 게 없다고 생각합니다. 한 걸음 한 걸음이 너무 고돼서, 한동안 저를 괴롭히던 마음을 떠올릴 여유가 없었습니다. 애초에 이걸 바라고 올레길을 걷고 싶었던 거였습니다.


잊어보려고 노력했습니다. 걸으면서 내 마음을 달래려고 노력했습니다. 힘든 와중에도 그 감정은 불쑥불쑥 튀어나왔지만, 그때마다 높은 경사가 제 생각을 차단했습니다. 꾸역꾸역 올랐습니다. 위로 올라갈수록 데이터가 잘 잡히지 않았습니다. 음악도 없이, 카톡 알림음도 없이 오롯이 홀로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진공이었습니다.


3시간 반 동안의 걷기가 끝나고 마주한 곳은 다시 바다였습니다. 21코스이자, 올레길의 마지막 코스의 종착지인 종달 바당은 공허했습니다. 화려하지 않았습니다. 한용운의 시에 나온 '허무한듸!'라는 시구가 떠올랐습니다. 소소하고 사소했습니다. 허무하면서도 좋았습니다. 그래도 좋았습니다. 원래 인생이 이런 게 아니겠어요. 마음이 불타올랐다가도  그걸 받아주는 이가 없으면 금세 꺼지고 마는 게 감정 아니었던가요.


뙤약볕 아래 세 시간 반 동안의 걷기는 제게 불그스름한 피부만 남겨주었지만, 그래도 좋았습니다. 힘들고 불쾌한, 서글픈 감정이 올라올 때마다 올레길을 걷던 그 걸음을 기억하려 합니다. 그 걸음이 희미해질 때쯤, 또 걷고 싶은 길이 생기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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