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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umbrella Nov 09. 2020

엄마를 미워할 수 없어서.

엄마의 삶을 반추할 수밖에 없는 삶

처음 ‘우울증’이란 단어를 마주한 건 10살 때였다. 학교에서 우울증 검사를 했는데, 반에서 내 우울지수가 가장 높게 나왔다며 담임선생님이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때는 엄마도 나도 그저 사춘기가 일찍 찾아온 거라 여겼지만, 지금 와서 돌이켜보면 10살의 난 우울증에 시달렸던 게 맞다. 매일 어떻게 죽을지 생각했다. 당시 내가 살고 있는 집은 아파트 4층이었고, 낮았다. 그래서 그때의 내가 생각해낸 방법은 숨을 쉬지 않는 거였다. 방에 혼자 앉아 코와 입을 막고 숨쉬기를 거부했다. 하지만 아무리 숨구멍을 꽁꽁 막는다 해도 인간의 자가호흡능력은 유효했다. 그래서 죽지 못했다.


22살이 되고 우울증 진단을 받았다. 우울증 진단을 받기까지 꽤 많은 의사를 거쳤다. 첫 번째 의사는 학교에서 한 건강검진 결과서를 보고 우울증 초기라는 진단을 내렸고 약을 줄 정도는 아니라고 했다. 내 이야기를 듣더니 가족에게 너무 많은 기대를 하지 말라고, 가족에게 내 힘듦을 털어놓으라고 했다. 가족한테 말하고 나서 돌아오는 그 반응에 상처 받는다는 말은 차마 할 수 없었다.


두 번째 의사는 성격 탓이라 그랬다. 태어나길 이렇게 태어났다고. 그래서 평소에 성격을 잘 다스리며 사는 것이 중요하다 했다. 내 고통을 언젠가 신이 크게 쓰실 거라 했다. 엿같았다.


세 번째 의사는 우울증이 아니라 그랬다. 스트레스 검사를 했는데, 네 몸은 너무 멀쩡하고 건강하다고. 튼튼하게 낳아주신 부모님께 감사하라 했다.


네 번째 의사를 만나서야 확실하게 우울증 진단을 받았다. 의사에게 말했다. ”선생님 사람들이 힘들고 지칠 때 행복했던 기억을 떠올리며 버티라고 하는데, 저는 도무지 행복했던 순간이 떠오르지 않아요. 매 순간이 지겹고 끔찍했어요. 그저 꾸역꾸역 버텼어요.” 의사가 답했다. “만성이라 그래요.”


상담을 진행하면서 내 정서가 PTSD, 그러니까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로 인한 만성 우울증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워낙 오랫동안 지속돼온 우울이라 우울증이라고 눈치채는 게 쉽지 않다고 했다. 네 명의 의사의 판단이 제각기인 이유도 이래서였다. 보통의 우울증 환자보단 덜 우울하고, 그렇지 않은 사람보단 더 우울한 게 내 우울이었다. 내게 우울이란 너무 익숙해서 어느덧 내 뇌는 딱 호흡을 허락할 만큼의 우울만 적당히 내보내고 있는 듯했다.


내 외상은 엄마의 폭언이었다. 지금 울 사람은 네가 아니라고 했다. 진짜 죽고 싶은 사람은 네가 아니라 했다. 그때의 그 말이 잊혀지지 않는다. 그래서 울지 않는다. 꾀병인데 약을 자꾸 먹는다는 꾸지람을 듣지 않기 위해 약봉투를 소리 나지 않게 찢는 법을 터득해야 한다. 우울증 진단을 받고 나서 오히려 행복했다. 아, 이제 아파도 되는구나 라는 안도감이었다. 엄마는 내가 아프다고, 힘들다고 말할 때마다 꾀병이라 여겼다. 좀만 참아보면 사라질 거라 그랬다.


엄마가 가해자라는 소리를 하기 위해 이 이야기를 꺼낸 게 아니다. 이런 엄마가 밉다. 그런데 미워할 수 없다. 엄마의 발언이 이해가 되고 납득이 가서 더 괴로운 거다. 그런 말을 할 수밖에 없는 삶을 살았다. 그가 살아있는 게 용했다. 미워할 수 없어서 괴롭다.


난 엄마와 단 둘이 산다. 태어난 지 얼마 안 돼서부터 쭉 그래 왔다. 엄마가 아빠와 같이 살지 않는 이유는 간단했다. 돈을 안 줘서. 출산비용도, 결혼 후 생활비도 모두 엄마의 퇴직금에서 나왔다고 한다. 그러면서도 가장으로서의 권위의식은 끔찍이도 높아서 절대 이혼은 안 해줬다. 자기 친권을 포기하지 못해서였다. 나의 키가 얼마나 자라는지는 상관없이, 내가 자신의 딸이라는 법적 권리가 그에게 가장 중요했다. 그는 자신이 저지른 행동에 대해서는 대체로 책임을 지지 않았다.


엄마와 아빠는 지인의 중매로 만나 짧게 연애했고, 단숨에 결혼했다. 엄마는 결혼할 당시 5개월 된 임산부였다. 그 사실을 알게 된 후 항상 고민했다. 엄마와 아빠의 결혼은 나 때문에 고민할 겨를도 없이 치러진 걸까. 만약 내가 없었다면 그들은 결혼했을까. 적어도 서로를 파악할 시간은 주어지지 않았을까.


22살 여름, 우울증은 존재 자체에 대한 의문으로 이어졌다. 내 정체성은 한순간의 욕정의 산물.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언젠가 이 생각을 밖으로 내뱉은 적이 있다. 그 말을 들은 사람은 적어도 그 순간에는 사랑했을 거라고, 그러니 너는 사랑의 결실이라는 소리를 들었다.


엄마와 아빠의 섹스는 사랑이었을까. 사랑하면 꼭 섹스를 해야 하는 걸까. 사랑의 결실은 섹스를 통해서만 맺어지는 걸까. 존재만이 사랑의 결실인 걸까. 존재는 꼭 사랑의 결실로만 태어나야 하는 걸까. 그렇지 않은 존재는 우울해야만 하는 걸까. 우울한 존재는 그 우울을 극복해야만 하는 걸까. 24살이 이러고 있어도 될까. 아직 사회에 나갈 준비가 덜 되어있다고, 도무지 나갈 힘이 나지 않는다고 말해도 될까.


자꾸만 만약이라는 가정을 하게 된다. 부질없는 일이라는 걸 안다. 내가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우리 엄마는 어떤 삶을 살았을까. 엄마가 만약 엄마가 아니라 아빠였다면 어떤 삶을 살았을까. 엄마는 34살에 날 낳았다. 그때 기준으로는 늦은 출산이었다. 결혼한 지 일 년도 안돼서 아빠와 별거에 들어간 이래로 날 돌봤다. 엄마는 여전히 날 돌보고 있다. 이제는 내가 엄마를 돌봐야할 때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의 돌봄을 기꺼워한다. 월세를 내고, 전기세를 내기 위해. 인터넷 통신비를 내기 위해 일한다. 엄마의 노동 없이는 난 공부할 수 없다. 책을 쌓아 놓아둘 공간도, 노트북을 켜는 데 사용할 전기도, 수업을 듣기 위한 와이파이도 사용할 수 없다.


임신 중단. 임신한 사람이 자신의임신을 지속하거나 중단할 권리를 뜻하는 단어다. 한국에서는 낙태라고 불리는 그것. 낙태는 떨어질 락(落)을 쓴다. 자연스레 ‘추락’이라는 단어가 떠오른다. 낙태를 하지 않음으로써 어떤 존재는 지켜진다. 낙태법으로 인해 가능성 있는 존재는 살아남고, 이미 발생한 존재의 존엄은 추락한다. 추락과 동시에 그 존재를 품어야만 하는 다른 존재는 많은 것을 포기해야 한다. 왜 태어날 존재만큼 이미 태어난 존재에 대한 존중은 이루어지지 않는 걸까. 왜 사회는 임신과 출산을 요구하면서 출산 이후에 벌어질 돌봄은, 그 일생은 모조리 가족에게 떠넘기는 걸까.


엄마가 다니는 회사는 도무송 공장이다. 경리로 들어갔지만, 엄마는 매일 수백 개의 스티커를 붙이고 박스를 접는다. 기계 아래 떨어진 파지를 줍는다. 같이 일하는 회사 사람들은 담배를 피우고, 욕을 남발한다. 그런 환경에서 엄마는 몇십 년째 일하고 있다. 엄마는 퇴근시간이 되면 물티슈로 몸을 뒤집어버린 먼지를 닦아낸다. 매일 하는 의식이다.


왜 엄마의 노동은, 엄마의 돌봄은 ‘강인한 엄마’ ‘대단한 엄마’ ‘좋은 엄마’라는 단어로 지워지는 걸까. 엄마가 노동을 하며 느꼈던 모멸감과 빨래를 널고 나서 느끼는 허리의 통증은 왜 아무도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걸까. 왜 당연시 되는 걸까. 왜 그저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여겨지는 걸까. 왜 생로병사의 일로 치부되는 걸까.


아빠는 대형병원의 설비원으로 수 년째 일하고 있다. 몇 년 전까지는 친할머니와 같이 살았으며, 지금은 그의 누나의 가족과 함께 산다. 그를 향한 그의 엄마와 혈육의 돌봄은 도무지 끝나질 않는다. 경마를 하고 도박을 한다. 술을 마시고, 술에 취한 채 전화해 그의 딸에게 “네가 크면 다 알게 될 거라고.” “크면 다 알려주겠다.”라고 한다. 그 소리가 그의 딸 인생의 절반을 맴돌았다. 아빠의 비행과 무책임함은 ‘남자들이 그렇지 뭐.’라는 말로 설명됐다. 내 아빠는 수많은 나쁜 아빠 중 하나일 뿐이다. 써놓고 보니 나쁜 아빠 축에 들기엔 너무 사소한 행동인 것 같기도 하다.


왜 아빠의 폭언은 , 왜 그의 폭력성과 일방성은 ‘나쁜 아빠’라는 한 단어로 설명되는 걸까. 그 한 단어가 아빠의 모든 폭력을 설명하는 걸까. 왜 아빠는 나빠도 되는 걸까. 왜 나쁜 아빠보다 나쁜 엄마가 더 나빠보일까. 왜 아빠가 주장했던 나에 대한 친권은 아빠와 엄마 중 한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거였을까. 왜 나를 돌보지 않는 아빠가 내 친권을 주장할 수 있었을까. 나는 아빠에게 소유물이었던 거다. 정력의 산물. 정상 가족을 이뤄낼 수 있었다는 증거.


엄마는 아빠가 손찌검을 하는 사람은 아니더라도 조심해야 한다면서, 이혼소송을 하지 않았다. 보복이 두려웠던 거다. 왜 그 보복은 그 행위자가 아빠라는 이유만으로 설득력을 갖는 걸까. 그렇게 20년이 넘는 시간을 살았다. 왜 엄마는 아빠에게 이혼을 요구하지 못했을까. 왜 엄마는 날 데리고 살았을까. 왜 여전히 내 끼니를 걱정하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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