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레 얘기가 나오지만, 벌레만 이야기하진 않아요.
우리 집은 벌레의 소굴이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그들의 집에 엄마와 내가 얹혀살고 있다. 매일 그들을 마주한다. 돌아다니는 그들, 뒤집혀 있는 그들, 갓 태어난 그들. 그들은 밤이고 낮이고, 접시고 커튼이고 할 것 없이 돌아다닌다.
그 집에서 우린 삼 년째 살고 있다. 벌레를 잘 잡던 엄마는 이젠 벌레를 휴지로 잡지 못한다. 벌레를 잡을 때의 촉감을 이기지 못하겠단다. 크기에 상관없이 벌레를 무서워하던 나는 이제 어떤 벌레든 잘 잡는다. 그 집에서의 삼 년이라는 시간은 우리를 이렇게 바꿔놓았다.
잠에서 깨 화장실을 보러 가는 순간조차 벌레를 밟지 않을까 걱정한다. 역시나 그가 기어간다. 그를 잡으려 휴지를 뜯는다. 그는 소리에 민감하다. 그를 죽이고 손을 씻는 나를 봤다. 한 존재의 체액이 묻었을까 염려하며 손을 닦는 나. 애써 그는 유해한 존재라며, 징그러운 존재라며, 죽일 수밖에 없는 존재였다며 깊게 생각하지 않으려 한다.
문득 고등학교 때 읽었던 카프카의 ‘변신’이라는 소설이 떠오른다. 그는 왜 자신의 모습을 ‘벌레’로 변신시켰을까. 그리고 ‘충(蟲)’이라는 단어가 떠오른다. 왜 사람들은 누군가를 미워하고 비웃을 때 벌레라는 존재를 끌어들일까.
잠에 들기 위해 애써 외면했던 그의 체액을 떠올린다. 그의 존재는 유해할까. 왜 우리는 그의 이름을 호명하는 것조차 꺼리는 걸까. 왜 나는 이 글을 쓰는 순간조차도 그를 한 번도 호명하지 않은 걸까. 그 벌레가 바퀴벌레라고, 단 한 번도 말하지 않은 걸까. 인터넷에서조차 그는 ‘바선생’으로 불린다.
나는 왜 벌레를 혐오할까. 우리는 왜 벌레를 혐오할까. 나보다 다리가 많아서? 나와 다르게 더듬이가 있어서? 그래 결국 결론은, 나와 다르게 생겨서인가?
그를 싫어하는 내가 싫다. 하지만 그를 싫어하는 것을 멈출 수 없다. 그를 향한 혐오를 멈출 수 없는 내가 싫다. 하지만, 도저히 그를 혐오하지 않을 수 없다. 내가 그를 혐오하지 않는 날이 올 수 있을까.
아니 나는 어쩌면 그 방법을 알고 있을지 모른다. 인정하면 된다. 그들 눈엔 나도 벌레라는 걸 인정하면 된다. 아니, 벌레 그 이상의 존재일 거다. 바퀴벌레 눈엔 나만큼 끔찍하고 거대하며 징그러운 존재도 없을 거다. 자기의 종족을 죽이고, 먹이로 가장한 독을 곳곳에 뿌려대는 못된 존재. 그들 눈에 나 역시 벌레다. 그걸 인정하면 된다. 우리는 우리 서로에게 벌레, 아니 끔찍한 존재고, 그래서 우리는 어쩔 수 없이 그저 함께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걸 인정하면 된다.
하지만 지금의 난, 적어도 오늘의 난 그들을 인정할 수 없다. 받아들일 수 없다. 그들의 존재를 눈감아 줄 수 있는 날이 내게도 올까. 그들의 공존을, 필통 속에서 날 반기는 그들의 존재를 환영할 수 있는 날이 내게도 올까. 내가 나와 다른 존재를 진정 받아들일 수 있는 날이 올까.
그래, 평생 못할지도 모른다. 그걸 인정하는 게 오히려 답인 걸까. 김애란 작가가 말해줬듯이.*
*눈먼 자들의 국가, 문학동네, 2014, 18쪽.
레’로 기우리 집은 벌레의 소굴이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그들의 집에 엄마와 내가 얹혀살고 있다. 매일 그들을 마주한다. 돌아다니는 그들, 뒤집혀 있는 그들, 갓 태어난 그들. 그들은 밤이고 낮이고 접시이고, 커튼이고 할 것 없이 돌아다닌다. 억하는 이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