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솔뫼, <우리의 사람들>
박솔뫼 작가의 신작 <우리의 사람들>의 서평단에 신청해서 당첨됐다. 박솔뫼 작가의 이름은 작년에 들었던 현대비평론 수업에서 처음 들었는데 뇌리에 강렬하게 박혀있었다. 작가 이름이 너무 익숙해서 수업 시간에 한 작품 정도는 읽어본 줄 알았는데 <우리의 사람들>을 펼쳐봤더니 처음 읽어보는 작가였다.
어떻게 처음 읽는 작가인지 단숨에 알아챘냐 하면 작가의 독특한 문체 덕분이다. 말 그대로 의식의 흐름 기법이다. 최근에 기사 피드백할 일이 많다 보니 비문을 잡고 주술구조를 찾는 데 혈안이 되어 있는데 이 책은 그런 에너지를 쏟을 수 없게 만드는 책이었다. 처음에는 적응이 되질 않아 진도가 안 나갔고,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읽었나 인터넷도 뒤져봤다. 대체로 평은 소설인지 에세인지 잘 모르겠다. 라는 식이었다.
다만 내겐 지극히 소설이었다. 소설의 허구성을 방패 삼아 제 생각을 있는 그대로 나열하고 있다는 인상을 많이 받았다. 그리고 문장의 두서없음이 지지로 다가오기도 했다. 너도 그런 생각을 해? 나도 그런 생각을 해,하고.
소설에서 가장 매력적이었던 점은 인물에 대한 가치판단이 이뤄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소설 속 화자는 가치판단을 하려다가도 이내 멈추어 선다. 그 알맞은 ‘적당함’이 좋다. 한 존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건 정말, 정말 정말 쉽지 않은 일인데 소설 속 ‘나’는 그걸 참 잘 지키는 사람이었다. ‘예의 바르다’라는 수식어가 참 잘 어울리는 존재.
하지만 ‘나’는 자신에게도 예의 바른 사람이다. 타자를 위해 자기 자신까지 희생하는 사람은 아니다. 써놓고 보니 되게 이기적인 사람으로 여겨질 수 있는 뉘앙스가 있는데, 이기적이라는 뜻은 아니다. 타인에 대한 가치판단을 하진 않지만, 다른 존재가 나를 침범했을 때 느끼는 불쾌하고 불안한 감정들을 튕겨내지 않는다. 자기 자신을 잘 지키는 사람이라는 점이 매력적이었다. 이 미지근한 매력을 가진 ‘나’가 이렇게 되기까지 많은 시간이 걸렸을 것 같다. 다만 이 소설은 그 시간을 나열하는 게 아니라, 그 시간을 거쳐 ‘나’가 어떤 사람이 되었는지를 보여준다.
<우리의 사람들>은 소설집인데, 총 8편의 단편이 실려있다. 하지만 읽다 보면 자연스럽게 소설들끼리 연결된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예를 들면, <우리의 사람들>과 <건널목의 말>에서는 ‘동면’이라는 화두가 계속 언급된다. 주인공은 ‘사실 인간도 동면을 했던 종족’이라는 가설을 참 맘에 들어 한다. 처음 들어보는 이 기이한 가설은 ‘나’ 스스로 자신의 무기력함에 대한 죄책감을 덜어낼 수 있는 이론으로 작용한다. 얼핏 들으면 우스운 이 가설을 믿고 안도하는 ‘나’가 귀엽고 짠한 부분이다.
그런데 잔잔하게 진행되던 소설이 갑자기 절정?을 맞이한다. 네 번째로 수록된 <이미 죽은 열두명의 여자들과>는 이 책 중에 가장 기괴하고, 섬뜩하다. 웃긴 점은 그래서 가장 술술 읽히는 구간이었다. 그리고 위에서 언급한 타인에게도, 스스로에게도 예의 바르고 적당한 ‘나’의 건조한 태도가 가장 잘 드러나는 소설이기도 하다.
솔직히 재미로 읽는 소설은 아니다. 다만 생각이 너무 많아 머리가 터져버릴 것 같은 날, 감정이 두통으로 발현되는 날, 아니 그런 감정으로 잠들고 깨어난 다음 날 읽기 좋은 책이다. 가끔 생각이 너무 많은 내가 질리고 싫을 때, 내가 너무 유별난 것 같은데, 그런 나를 어찌할 수 없는 무력감에 짜증 날 때 읽기 좋은 책이다. 나처럼 복잡하게 생각하며 사는 사람이 여기 또 있구나, 하고 나와 비슷한 존재를 마주했을 때 오는 위안이 책이 된 느낌이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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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 밑줄 친 문장들은 어, 나도 이런 생각한 적 있는데. 나만 그런 게 아니구나. 라는 반가움을 주는 부분들이었다.
16쪽.
“매번 할 수 있을까? 이걸 왜 하는 걸까? 하는 고민을 한다. 안 해도 나에게 아무 지장이 없는데 왜 하는 것일까. 매번 왜 하는지 어떻게 가능하게 할지 생각하면 괴롭다.”
45쪽.
시간은 흐르고 하던 것을 하고. 그런데 자꾸만 부산에 다시 가고 싶었다. 거기서 잘 쉬고 여기로 돌아와 일을 열심히 하고 마음을 다잡고 주어진 일에 감사하고 운동화 끈을 고쳐 매고 경마장의 말처럼 달리는 사람이 될 수가 없나 나는? 나는 그런 생각을 하는 데 쓸 힘이 없었고 점심을 먹고 저녁에 뭐 먹지 생각하는 것처럼 가을 이후로 한동안 부산에 갈 기회를 살피는 날들이 계속되었다. 말을 하기 싫을 때 자꾸만 말을 의심하게 될 때 다시 부산에서 쉬고 싶다고 자동적으로 생각했다.
54쪽.
먼 과거가 아니라 현재의 시간을 살지만 동면을 하는 나. 여전히 말을 하고 싶지 않고 일기를 쓰려고 하는 동면을 하는 나.
55쪽.
하지만 대부분의 꿈들은 기억이 나지 않고 나는 적어도 나는 내가 있었다면 내가 했다면 좋았을 것에 대해 그것은 허황된 꿈과 바람이지만은 않고 사실 했을 법하지만 왜인지 아련한 것들에 관해 쓰기 시작합니다.
76쪽.
가끔 난 친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그러나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폐를 끼치고 싶다고 생각한다. 저를 위해 무언가를 한순간 포기해주십시오. 저의 고민을 떠안아주십시오. 나 역시 아주 가끔 누군가의 불덩어리를 삼키고 싶다는 생각을 하기도 한다. 물론 곧 사라지는 생각이다.
91쪽.
이런 것만을 계속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134쪽.
나는 눈으로 보이는 분명한 글자들, 무덤의 비석이라든가 손으로 쓴 대자보 같은 것들이 다른 시각적인 요소들보다 어째서 늘 분명하게 기억에 남지 생각했다. 한눈에 이해할 수 없는 글자들이어도 왜인지 강하게 기억에 남았다. 비석의 글자를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사람들은 더 선명하게 그 글자들을 받아들이겠지?
150쪽.
각자의 요즘 이야기를 하고 나는 힘든 이야기를 하려고 하면 여전히 많지만 왠지 하고 싶지 않았고 그건 마리아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까페 안에 갇혀 있듯 갇혀 있지 않은 시간이 어제, 지난주의 일 같고 그 이야기만 잠깐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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