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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umbrella Feb 05. 2021

너, 아니 나에 대한 착각

김애란, '벌레들'

김애란의 소설집 <비행운>을 좋아한다. 그중에서도 가장 좋아하는 소설은 '벌레들'이라는 단편이다. 소설에는 장미빌라에 신혼집을 마련한 신혼부부가 등장한다. 그리고 그들의 집을 점령한 벌레들도 등장한다. 벌레들이 득실거리는 곳에서 여자는 임신을 하고, 육아 휴직을 하고, 출산을 기다린다.

그 소설을 좋아했던 이유는 당시 내 상황과 겹치는 부분이 많아서였다. 당시에는 바닥에 떨어진 검은 털실만 봐도 온몸에 신경이 곤두섰다. 벌레를 한 번도 마주치지 않는 날이 손에 꼽았다. 소설을 보며 그 여자에게 시선이 쏠렸다. 여자의 기분을 알 것 같아서. 내 집이 내 집 같지 않은 기분을.

그렇게 아리게 박힌 소설로 남아있던 <벌레들>을 전공 수업에서 분석 텍스트로 만나게 됐다. 근데 수업에서 교수님이 그 여자를 겁나게 까는 거다. 여자가 벌레를 대하는 태도에서 타인에 대한 존중과 사랑의 부재가 나타난다면서 말이다. 그때 속으로 아, 교수님 뭘 모르시네. 벌레 소굴에 살면서 벌레를 어떻게 사랑해, 너무 야박하다고 생각했다.


근데 이제는 교수님이 왜 그 여자를 비판했는지 알 것도 같다. 소설 속 '벌레'의 존재는 타인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그들은 어떤 존재인가. '남을 돕겠다고, 더 좋은 사회를 만들자고 할 때 상정하는' 그 누군가는 대개 무고하고, 순진하고, 열악한 곳에 처해있다. 차마 도와주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사람들, 그들을 도와주지 않고 지나쳐버리면 죄책감을 주는 존재들로 존재한다.

하지만 타인은 그런 존재가 아니다. 타인은 무해하지 않은, 흉측하고 끔찍할 수도 있는 존재다. 그들도 나와 같을 뿐이다. 때론 치졸하고 옹졸하며, 시끄러운 속마음을 가진 존재다. 나도 그들도, 우리는 순진하고 순수한 존재가 아니다. 그냥 하루하루 주어진 공간에 살아가는 존재다. 연약하고 가냘파서 내가 도와줘야 하는 존재가 아니다. 나와 너는, 그러니까 우리는 그냥 어쩌다 보니 같은 공간에 위치하게 됐고, 그래서 서로를 인정해야 하는 사이일 뿐이다.

그렇다면 보이는 대로 벌레를 죽이던 주인공을 비난받아야 하는가? 차마 그럴 수 없다. 벌레의 소굴에서 사는 게 얼마나 끔찍한지 안다. 그런 곳에서 사는 사람에게 벌레를 죽였다고, 사랑이 없다며 매도하는 건 또 다른 폭력일 뿐이다. 하지만 여자를 마냥 옹호하기엔 어딘가 찜찜하다. 어떻게 하면 이 찝찝함을 벗어날 수 있을까.

짚고 넘어가야 할 건, 여자의 벌레 혐오가 자기 자신에 대한 혐오와 맞닿아 있다는 점이다. 소설에서 등장하는 벌레는 주인공의 우울과 불안, 고통의 정서와 맞닿아 있다. 주인공이 벌레를 극도로 혐오하는 것은 아마 벌레가 나타나는 자신의 집인 장미빌라에 대한 혐오, 그리고 집 문제로 인해 쫓기듯 장미빌라를 계약해버린 자신이 처한 상황에 대한 분노 때문일 것이다. 열악한 처지로 내몰린 자신의 처지에 대한 주인공의 분노와 우울은 벌레들에 대한 혐오로 가시화된다.


벌레를 혐오하는 그 역시 벌레다. 여자에게 필요한 건, 벌레에 대한 혐오를 멈추라는 게 아니라, 자기 자신 역시 벌레라는 인식이다. 벌레여도 괜찮다고 말해주는 또 다른 벌레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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