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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과농부 세네월 Mar 03. 2019

또 다른 시작인데..

2019년 2월 영농일지  

B형에게,


이번 겨울이 이렇게 가면 안될 텐데요. 코끝이 찡해지는 매서운 추위나 펑펑 쏟아지는 눈발을 바라지는 않겠지만 이렇게 슬며시 물러가고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봄이 오면 안 되는 것 아닙니까? 설 이후에 시작한 전정은 이제 겨우 1/4 정도 한 셈이고 사과꽃 피는 4월 말 이전에 해야 할 일은 산더미 같은데 과수원 바닥의 마른풀 사이로 올라오는 초록의 싹들이 벌써 저렇게 많으니 겨울이 이렇게 혼자 내빼면 안 되는 것 아닙니까? 4월 말이면 한참 남았는데 하시겠지만 바쁠수록 그리고  일이 많을수록 시간이 빨리 가는 것 잘 아시지요?  


농사일 시작하고는 언제나 봄이 무서운데 정확히 무엇이 무서운 걸 까요? 끊임없이 해야 하는 일도 아니고 봄 그 자체는 물론 아니고.... 지난번에 올해는 조물주와의 동업이 잘되면   멋진 사과를 만들 수 있겠다는 근거 없는 자신감에 대해 말씀드렸는데 아마도 '시작'에 대한 두려움이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것은 분명 대단한 축복이고 행복한 일이지만 "시작"한다는 것은 시작으로 전개되는 매 국면에 수반되는 처리해야 하는 일, 그리고 결과 대한 책임에 대한 부담감 때문에 두려운 것 일 수도 있겠지요. 학교 다닐 때나 회사 다닐 때 매년 했던 '시작'인데 유난 떤다고 생각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도 그 생각했습니다. 뭐가 다를까? 혹은 매 시작마다 두려웠섰나?를 생각해 봤습니다. 매번 새로운 시작마다 앞으로의 결과에 대해 걱정한 것은 당연하지요, 상급학교로 진학했을 때 혹은 회사를 옮겼을 때는 걱정과 두려움 그리고 설렘 약간이 혼재되어 있었지요. 농사일하며 맞는 봄이 특히 두려운 것은 첫해의 농사가 시작되는 봄에 느꼈던 걱정과 두려움이 기억 깊숙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 입니다만 정확히는 걱정+두려움+ 설렘 약간이 맞는 상황입니다. 농사일이 과거의  봄 혹은 시작과 조금 다른 점은 주요 등장인물이 매번 같다는 것입니다. 조물주, 사과나무들, 무대가 되는 토양, 나 그리고 가끔씩 출연하는 새들, 곤충들 , 곰파이들, 세균들 그리고 아! 조연급인 잡초들. 같은 무대에서 같은 주체의 같은 배역이지만 매번 다른 스토리 전개는 흥미진진한 연극으로 이런 연극을 매번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것은 진정 멋진 일입니다. 그러나  기억의 조각에 덧붙여 나이를 먹을수록 일과 책임의 무게가  더욱 무겁게 느껴지는 것이 걱정과 두려움을 만드는 요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일' 이란 말이 나왔으니 말 입니다만 지난 설날 연휴는 농사일 시작한 후에 처음으로 서울 집에서 4박을 했습니다. 집에 있는 동안 친구 만나고 서점 다녀온 시간외엔 먹고 자고 소파에 붙박이로 앉아 TV보기만 했습니다. 딸네미가 "아빠 호캉스 하네"라고 했는데 정말 그랬습니다. 봉화에 내려온 그 순간부터 저녁식사 후 정리가 끝나는 그 순간까지는 매 순간 일하는 저를 보면서 호캉스였었다는 것을 실감했습니다. 그러나  일이 있다는 것은 즐거운 부담입니다. 농사일의 장점이자 단점이 " 항상 일이 있다는 것" 이란 것은 벌써 말씀드렸지요? 일에 대한 걱정은 정확히는 일에 대한 것이 아니라 나 자신에 대한 것입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것입니다. 전정중인 지금 제가 가장 많이  생각해야 하는 주제는 ' 내가 하는 전정 행위가 나무, 너에게 좋은 것이기를"란 고밀식 재배 큰 선생이신 신 선생 주제'이며 전정의 목표 입니다만 일단 일을 시작하면 일 하는데 정신이 팔려 기게 적인 행위자로 열심히 가지를 자르고 쓸데없다고 여겨지는 꽃눈을 제거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합니다. '앗, 이래서 안되는데..' 하는 경우가 하루에도 몇 번씩 있습니다. 물론 전정은 전술한 그런 작업의 연속입니다만 열심히 자르고  제거하는 일만 하면 나무가 아니라  공산품을 상대하는 것입니다. 상대는 생명을 가진 사과나무지요. 아직은 아니지만 "교감"이 되는 아니 교감까지는 안 가도 나무의 상태를 이해할 수 있는 상태가 되려면 전정 전에 "내가 하는 일이 너에게도 좋은 일이기를" 하고 말을 건네고 시작하는 예의와 마음가짐이 필요하겠지요.  전정은 톱과 가위를 사무라이 칼쓰듯이 휘두르며 빨리빨리 전진하는 것이 분영 아닌데 일단 일을 시작하면 목적을 잊고 수단에 몰두하는 내가 걱정입니다. 가끔은 작년에 제가 나무에 해 놓은 만행의 흔적(참담하게 자른 자국)을 보면 창피하기까지 합니다.


책임의 무게는 일 년 농사가 꽝이면 허무하고 참담하니 당연합니다만 경험이 쌓이면서  생기는 기댓값이 허물어지는 것이  제일 힘들 것입니다. 생각해 보면 지난 3년간 수확량은 조금씩 줄었는데 그 이유가 수령의 노후화로 인한 것인지, 날씨 탓인지, 아니면  제 관리 능력 탓인지가 명확치 않아서 항상 나보다 더 낮은 점수를 보고 상대적인 위안을 느겨껴왔습니다. 아직까지 절대적인 단위당 생산량, 매출이 주위와 비교해서 나쁘지 않으니 댜행이긴 합니다만 올해 식재 3년 차가 되는 고밀식 나무들이 잘 커줘야 할 텐데 걱정입니다.

어느 새인지 식사 거리를 저금해 놓고 잃어버렸네요.

오늘 전정은 12번과 13번 줄의 상부에 집중했는데 이곳은 작년에 부란병으로 진흙에 약을 섞어 나무에 바르고 진흙이 흘러내리지 않도록  방수제까지 바른 구역이지만 소용없이 몇 나무는 주간 전체에 병이 번져서 제거해야 합니다. 작업을 빠르게 하기 위하여 가지를 다 제거하고 들어 왔습니다. 저녁을 먹으면서 '데이비드 조지 해스컬"이 지은 '숲에서 우주를 보다" 읽다 보니 나무들이 근권으로는 미생물 네트워크로 연결이 되어 서로 정보는 물론이고 영양분도 나누어 준다고 하는 부분을 봤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이렇게 병이 주간 주위를 다 먹어서 아직까지 살아있는 게 신기하다고 생각한 나무들이 있었는데 아마도 주위의 도음을 받고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런 얘기는 저번에 말씀드린 "페터 블레벤"이 지은  '나무 수업"이란 책에도 생생한 경험담이 나와 있습니다. 우리 학교 다닐 때나 근래 토양 교육받을 때 미생물 얘기는 들었지만 네트워크 얘기까진 들은 기억이 없는데 상기한 책 2권을 보면  (한 사람은 미국, 다른 이 이는 독일) 숲 전체의 나무의 뿌리가 미생물 네트워크로 연결되었다는 것은 이미 사실로 보는 모양입니다. 데이비드 조지 해스컬이 지은 '나무 노래"란 책도 같이 보고 있는데 식물 및 곤충에 대한 방대한 자료조사의 결과겠지만 그의 설명이나 주제가 매우 흥미로워 일독을 권합니다. 저도 개인적으로 고밀식 과원의 자연초생에 관해 글을 써 봤으면 하는 생각이 있는데 그러려면 연구와 조사 그리고 관찰이 필수적인데 올봄부터 정신 똑바로 차리고 있어야 가능할 것입니다.


전정과 더불어 작년에 못준 밑거름으로 유박도 줘야 하고 토양검정 결과 과원 일부가 약산성 (ph5.7) 이 나와 윗집 박 선생에게 얻은 석회고토도 살포해야 하고 또 개화 이전에 작업장을 다시 짓는 것도 마쳐야 합니다. 그래서 제가 가는 겨울을 끝까지 붙잡고 늘어지려는 것인데 B형도 가는 겨울을 같이 붙잡아 주시지요. 그것이 여의치 않으시면  내려오셔서 저를 도와주시던가..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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