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물 봄 야생화 구경
열심히 야생화 쫓아다니던 때가 있었다. 처음에는 산행 중 눈에 든 야생화의 아름다움에 그리고 macro 렌즈를 통해 카메라에 나타나는 그림에 매혹되었다. 유감스럽게 그리고 싶어 하는 그림은 내 카메라를 통해 재현되지 않았지만 가끔씩 내 사진에 스스로 만족해하는 재미도 덤으로 있었다. 사실 살면서 내가 한 일에 대해 스스로 대견해 할 수 있는 기회는 그리 많지 않은데 야생화 사진 찍기 덕에 자신을 칭찬하는 경우가 생긴 것은 정신건강상 아주 유익한 일이었다.
그때에 봉화는 '복주머니난'과 '솔나리'가 피면 가는 곳이었지만 정작 봉화에 자리 잡은 5년 반 동안 솔나리 보러 간 적이 딱 한번 있을 뿐이다. 예전에는 매년 '솔나리'를 찍으려고 새벽 4시에 집에서 나와 함백산 거쳐 봉화 다시 서울로 가면 700km 이상 되는 거리를 마다하지 않고 다녔는데 이제는 삼십 분 이면 갈 수 있지만 쉽게 가지지 않는다. 그러나 때로는 이 맘 때면 얼레지가 필텐데 하는 생각은 하는데 얼마 전 페친의 산행 사진에서 얼레지를 보곤 가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얼레지는 나를 야생화의 세계로 인도한 장본인 이기 때문이다. 어느 봄날, 혼자 한 연인산 자락 능선의 흐드러진 얼레지 군락의 꽃밭부터 야생화와의 인연이 시작되었다. 봉화에 와서도 얼레지 자생지를 탐문하여 자생지는 알았는데 개화기를 맞추기가 힘들었다. 이번에는 끝물이고 봉화지역은 아니지만 아직은 가능하단다. 예전에는 태백산이 봉화군 관할지역이었고 접경지역이니 봉화로 봐준다.
방제를 일찍 마치고 가벼운 군장으로 핸드폰만 넣고 가고 싶었던 백천계곡- 문수봉 코스로 가면서 얼레지를 보고 싶었으나 담당 직원이 어제 유일사 코스에서 드문 드문 얼레지를 보았다 하여 태백산 유일사 코스로 방향을 돌렸다. 가는 길에 올봄에도 어김없이 찾아온 열목어도 확인한다. 백천계곡은 태백산의 남쪽 입구로 열목어가 사는 남방한계선이다, 외진 지역으로 인해서 탐방객이 많지 않아 천만다행이다.
유일사 코스는 기생꽃 찍으러 다닌 곳이었는데 5월 중순에 얼레지를 보러 오르다니 장소에 따라 얼레지의 개화시기가 2달 이상 차이가 난다. 육지에서는 아주 따뜻한 지역으로 생각되는 삼척 근처에서는 3월 초에 피고 서울 근교 화야산은 4월인데 태백산은 5월이다. 내게 맞는 때를 기다리며 서두르지 않는 것, 야생화의 미덕이다.
얼레지
좌측의 꽃이 첫 번째 만난 얼레지로 사실은 꽃이 지기 시작한 꽃이다. 얼레지는 우측 사진처럼 꽃잎을 바짝 세운 약간은 도도한 젊은 아가씨 같은 이미지가 제격이다. 그 꽃말도 " 질투, 바람난 여인"이다. 그 꽃말이 머리에 남아있어선지 처음 본 얼레지는 "흐드러지다"와 "흐트러지다"의 두 말이 동시에 떠 올랐다. 어찌 보면 흐드러지게 핀 것처럼도 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꽃잎 끝이 말라가고 있으니 좋게 봐준 것은 같이 나이 먹는 동병상련의 발로다. 어쨌든 꽃잎의 무늬와 색 군더더기 없는 외형의 매력적인 모습을 몇 년 만에 대하니 온 보람이 있었다.
관중
고사리목의 양치식물이다. 관중에 대해서는 두 가지. 1. 저들이 무리 지어 피어 있는 모습을 보면 앙리 루소의 정글 그림이 연상된다. 실제로 루소의 그림엔 고사리 잎이 아니라 바닷속 미역 같은 그림인데 줄기들이 다발 지어 모여있는 장면이 그의 그림을 생각하게 한 듯하다. 2. 조물주의 패킹 솜씨는 언제 봐도 절묘하다.
피나물(노랑매미꽃)
산 전체를 노란빛으로 물들이는 피나물은 약간 형광이 들어 있는 듯한 노란색 꽃잎도 꽃잎이지만 특이하게 같지만 다른 노란색의 꽃술들과 어울려 특이한 인상을 준다. 흔하지만 자세히 보면 아름다운...
바람꽃 (홀아비바람꽃, 회리바람꽃, 꿩의바람꽃)
바람꽃은 종류가 많다. 푸른빛의 꽃술이 매혹적인 변산바람꽃, 꽃술이 약간 핑크 빛이 감도는 너도바람꽃 그리고 오늘 본 세 가지의 바람꽃들. 바람꽃은 그리스 신화의 바람의 신과 연계되어 학명에 Anemone로 시작되는데 홀아비바람꽃은 Anemon Koraiensis로 한국 특산식물이다. 저렇게 담백하고 깨끗한 이가 늘 홀아비로 있는 것이 안타까운데 꽃대가 하나씩 자라서 그런 이름이 붙었다는 말이 있다. 회리바람꽃은 산 입구부터 널리 퍼져 있는 반면 꿩의바람꽃은 딱 한 개체를 만났다. 야생화 섬으로 알려진 풍도를 3월 초에 가면 지천으로 만나는 꿩의바람꽃인데 이 역시 5월 중순을 지나 만나는 것 자체가 행운이다. 이 꽃은 수분이 모자라면 꽃잎을 닫는 다고 하는데 내가 만난 곳은 약간 수분이 부족한 듯 반만 피었다. 회리바람꽃은 특이하게 공 모양의 꽃이다. 작고 연한 꽃 모양에 자세히 봐야 아름답다.
다른 꽃들
괭이눈은 3월 초 천마산에서 만나던 꽃이 아닌 줄 알았던 꽃. 족두리풀은 꽃 모양이 족두리를 닮았다 하여 부르는데 꽃이 바닥에 놓여있어 꽃을 선명하게 찍기가 쉽지 않아 애를 썼던 기억이 있다. 요행이 바위의 이끼 위에 사는 모델을 만나 핸드폰으로도 어려움 없이 찍을 수 있었다. 개별꽃은 요철이 있는 똑같은 꽃잎 위에 하나씩 놓여있는 꽃술이 "공평무사"란 단어를 생가케 하는 꽃이다. 단아한 가지런함이 마음에 든다. 산딸기 꽃의 분홍색은 차분하지만 화려하여 아주 좋아하는 색이다. 대개 길가에 피는데 먼지를 뒤집어써도 예쁜 색은 주눅 들지 않는다.
저녁 약속으로 인해서 정상을 포기하고 유일사 입구에서 임도로 내려서 하산한다. 참 오랜만의 산행이고 야생화 구경이다. 무거운 카메라 장비로 찍지 않아도 핸드폰 사진으로 만족하고 또 딱 내 맘에 드는 사진이 없어도 그저 만난 것 자체로도 만족한 마음이니 이는 세월이 많이 가볍게 해 준 욕심 주머니의 무게 때문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