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차 적과를 시작했다. "또 적과 얘기냐?" 하겠지만 적과는 사과농사의 기본 체계를 마련하는 작업으로 5월 초부터 시작하여 6월까지 2달 이상이 걸리는 지극히 중요한 과정이다. 1-3차의 적과작업은 말하자면 특별대응 대책으로 120% 정도의 최종 선발을 위한 작업이고 3차 적과가 마무리되면 그 이후는 평소 대응 대책으로 수시로 과원을 다니며 미처 못 보고 놓쳤거나 흠이 있는 사과를 골라내는 작업을 하게 된다. 그래서 적과는 실제로는 착과 이후 수확하는 당일까지 수시로 이루어지는 작업이다.
그동안 외부인력 위주로 진행된 1,2차 적과가 빼기 위주의 1차 방정식이었다면 3차는 과원주가 해야 하는 함수 3개의 3차 방정식이다. 1차는 기본적으로 중심화만 남기고 다 자르기가 핵심이고 2차는 1차 때 놓친 사과 정리와 거리적과가 주요 작업내용이지만 3차는 나무 수세에 맞는 사과수와 사과 하나당 60-70장의 잎을 보장하며 적정한 간격을 두도록 정리하는 내용이다. 사과나무를 잘 아는 사람이 적정한 수량과 잘 자랄 수 있는 위치에 적당한 수량의 잎을 보장하여 진행하는 것이 최선으로 그러면 나무에 달려있는 사과들이 모두 일정한 크기로 자라며 착색도 잘되고 맛도 좋다고 한다. 적과도 전정처럼 전문적으로 해주는 사람이 있으면 좋은데 (전문적으로 해준다고 다 잘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런 것이 없다. 그러므로 " 사과나무를 잘 아는 사람"이 곧 "나" 여야 한다.
사과농사를 잘 짓는 우리 하선생님에 의하면 대한민국에서 1, 2위를 다투는 신선생님도 어렵다고 하는 게 적과라는데 어쨌든 과원주인 내가 하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이 없다. 그래서 적용하는 룰은;
1. 일단 지금까지 나무의 선택을 존중하여 다른 사과보다 작은 사과를 제거한다.
- 초반에는 크지만 갈수록 역전되는 위치의 사과들도 있다는 것이 문제.
2. 최종 선발수를 10% 정도 더 남겨 (적 정착과의 130% 정도) 시간을 두고 커가는 것을 보면서 정리한다.
- 그 결과 어느 해는 수확 2-3주 전에 몇십 상자를 따서 버린 뼈아픈 실수도 했다.
3. 가지의 굵기와 잎수를 보며 적정하다고 생각하는 사과 수를 과대지 및 과대의 길이를 보며 선발한다.
- 맞는 말이긴 한데 그렇게 행동을 취하는 것이 쉽지가 않아서 문제.
4. 무엇보다도 냉정하자. 내 맘에 맞게 가 아니라 나무에 맞게.
- 어떤 면에선 "바르게 살자"라는 캠페인보다 더 허공에 맴도는...
이렇게 적어 놓으니 말은 되는데 알맹이가 없는 것이 국회 국정조사 답변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다 보니 적과에 적용하는 원칙이 우리가 살아가며 적용해야 하는 원칙들이고 이는 어찌 보면 살아 있는 것들에 관한 것이기에 당연한 얘기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런 원칙들은 위에 서술한 잘 모르면서 일을 처리하는 "더듬이 방법"을 포함하여 몇 가지의 경우가 더 있다.
First things First
"적과를 왜 1차 2차 3차로 나누어하느냐? 어차피 같은 나무들이 대상인데 처음부터 중심화를 선택하고 사과 사이의 간격과 수세를 고려하여 한번에 하면 편하지."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사과나무를 잘 아는 사람이 적다는 것이 원인이기도 하지만 더 큰 이유는 농사에서는 "때"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한 번에 처리하려면 진도가 늦어져서 나무가 남아있는 모든 사과에 한정된 자원을 배분하느라 쇠약해지고 사과는 사과대로 초기에 필요한 영양분을 받지 못여 왜소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4-5일에 과원을 한 순배를 돌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나무와 과원주에게 좋은 일이다. 결국 할 일은 많이 있지만 "먼저 할 일을 먼저 하는 것"이 농사에서도 적과에서도 핵심이 된다.
보고 싶은 것만 보기
"보이지 않는 고릴라"가 당연히 존재하는 게 적과작업이다. "열간 가장자리 눈높이에 있는 사과 뭉텅이를 그것도 하나도 아니고 여러 개를 어찌 못 볼 수 있단 말인가?"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매우 흔하다. 다른 사람이 한 경우에는 너무 성의 없이 일 한다고 치부해 버리겠지만 내가 그랬으니 할 말이 없다. 열심히 본다고 보면서 일을 하지만 한 순간 다른 것에 정신을 쏟으면 눈 앞에 있어도 보이지 않는다. 지금 여기에 집중하자.
관점의 차이
사과농사짓는 사람들이 흔히 하는 말이 "그렇게 여러 번 돌아도 서너 개씩 있는 사과들은 꼭 나와요."이다. 이는"보이지 않는 고릴라" 효과와 더불어 "관점의 차이"에서 기인한다. 사과나무 열이 남북방향으로 있는 우리 과원에서 한 바퀴 돌자면 거의 한 방향으로 진행하게 된다. 중앙통로에서 남쪽이나 북쪽의 열간 끝으로 가면서 일을 하기 때문인데 진행하며 보는 시각이 일정하여 나뭇잎에 가려진 사과들이 일부만 보이거나 안 보이게 된다.
뒤를 돌아보다가 혹은 이미 지나온 건너편 열에서 작업 대상을 발견하는 것은 매우 흔한 일이다. 또 시선이 밑에서 위를 직선으로 올려다볼 때 혹은 그 반대의 경우에도 못 보던 작업 대상을 보게 된다. 적과를 잘하려면 그리고 잘 살기 위해서는 넓은 시야와 다양한 관점으로 사물을 보는 능력이 필요하다.
사족
요즘이 어린 청개구리들이 많이 나와서 사과나무에 올라 안전을 꾀하는 철이다. 그런데 어느 곳에서나 꿀보직 혹은 쉽게 먹고사는 자리는 있다. 심식나방의 출현을 예측하기 위해 심식나방 페로몬을 설치한 곳에 청개구리가 터를 잡았다. 심식나방이 16마리가 포획되어 있었는데 어제 가보니 9마리뿐이어서 들여다보니 청개구리가 최근에 잡힌 녀석들을 먹어 버렸다. 쫒아내버리고 오늘 다시 가보니 같은 녀석인지 가늠은 안되나 한 마리가 여전히 자리 잡고 있다. 페로몬에 홀려 들어오는 심식나방을 힘 안 들이고 먹으니 개구리는 좋지만 나는 심식나방 안테나를 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