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사과농사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사과농부 세네월 Jul 14. 2019

흙수저 몰아내기

끝이 없는 사과적과 작업

우리 하선생사단 ( 하선생에게 사과를 배우며 가끔 만나는 이들을 우리는 이렇게 부른다)이 애정을 담아  '교주님'이라 부르는 고밀식 사과재배의 거장 신 선생은 무슨 작업이든 3-4일에 한 번씩 과원을 돌 수 있게 하는 것이 좋다고 하였다. 나도 그렇게 하고 싶은 마음 굴뚝같지만 진도가 나가야 가능한 일이다. 빨리  나가야 하는데 새로운 나무 앞에 서면 사과가 적은 것이 적당해 보여 지나온 나무에 너무 많이 달은 듯 느껴져서 다시 뒤로 가서 좀 더 따는 작업을 하며 앞으로 뒤로 몸도 마음도 바쁘기만 하고 실리가 없다.


사과는 수확 시점까지 커지지만 지금이 자람세가 가장 좋을 때여서 최종 선발이 완료되었어야 하는데 아직도 허우적거리고 있다. 게다가 몇 년을 미뤘던 자재 및 기계 보관 창고까지 허물고 다시 짓는라 정신이 없을 정도로 기다리는 일들이 밀려있다. 바쁜 일부터 처리하며 시간이 가며 흘리고 놓치는 일들은 안 급하고 안 중요한 일이라 치부하는 게 맘 편하다.


우리 신 선생님  같은 거장도 아직도 어려운 것이 "적과"라고 하시니 내겐 더욱 어려운 일이다. 지금은 잘 하든 못하든  나름의 원칙으로 전정을 하지만 예전에 전정하려면 나무를 몇 번씩 쳐다보며 무엇부터 해야 하는지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고민했었다. 적과는 지금도 형편이 나아지지 않았다.


나무 앞에 서서 짚어 본다: 

1. 나무 수세에 적절한 숫자 일까?

2. 뺀질이 사과 (액화에 달려 맛이 떨어지고 껍질이 너무 매끈한 사과)를 빼야 하는데..

3.  맛있고 잘 클 수 있는 사과는 어떤 것일까?

그러다 결국 내 느낌으로 결정한다. 없는 사과를 만들 수 없는 일이니 적과는 뺄셈이다.


 "이 나무는 너무 많이 달렸으니 사과를 줄이자"라고 결정을 하면 우선 가장 많이 사과가 달린 가지부터 가지의 굵기에 적당하다고 생각되는 사과의 수에 맞춰서 흠과 나 작은 사과를 제거하는 작업을 한다. 그리고 다음 가지로. 작업이 완료되면 뒤로 물러서서 전체적인 모양을 본다. 전체적으로 사과가 적은 듯 보여야 모든 사과들이 비교적 고루 크고 좋아 보인다. "그게 답이면 쉽지 않은가? 적다고 생각할 때까지 열심히 사과를 따면 되는 일이네"라고 생각하겠지만 절대로 안 쉽다. 매번 "나름의 최선"을 다하여 사과 빼기를 하지만 이번 순번이 끝나면 다시 따내는 사과가 많을 것이다. 아마도 금수저들 만으로 쉽게 적은 듯 만드는 때가 온다면 그때는 내가 득도를 했을 때 일 것이다.  마음을 비우고 사과나무와 얘기할 수 있는 경지에 이르면 그리 될 수도 있을 것이다.

 

흙수저 자리 1 개의 사과와 금수저 자리의 3개의 사과크기들이 비슷하다.

모든 사과는 자기가 달린 자리만으로 금수저, 흙수저가 결정된다. 사회적으로는 흙수저는 존재하면 안 되는 분위기로 몰아가는 것으로 느낄 때도 있지만 자연의 선택은 냉혹하다. 흙수저와 금수저가 분명하고 그에 따른 대한 대우가 명확하게 다르다. 불평등하고 불공평한 듯 보이지만 자기 자리에서 받을 수 있는 만큼의 양분을 받는 것은 공평한 일이라고도 볼 수가 있다. 모든 이들이 같이 갈 수 없다면 같이 갈 수 있는 이들을 선발해야 한다. 자연은 그렇게 하여 선발된 우수종으로 다음 세대를 이어가게 한다.  문득 예전에 회사가 아주 어려웠을때 노조에 인원정리를 통보하면서 한 말이 생각난다. " 떠나는 이 보다 남는 이가 많아서 계속기업을 유지하는 것이 목표". 회사는 그 상황에서 그것이 정답이었으되 사과는 다르다. 나무에 맞게 남는 사과수가 결정된다. 버리는 사과가 많아도 어쩔 수 없다.


고전 읽기 모임에서 중용을 읽는 중인데 생지안행(生知安行)과 학지이행(學知利行) 그리고 곤지면행(困知勉行)은 대개 나면서부터 아는 것, 공부해서 아는 것, 고생하고 배우는 것으로 일단 알면 결과는 같다고 하였다. 결과에 관한 언급은 정책적 차원이고 사과를 기르지 않았으면 만민평등사상에 위배되는 일이라고 흥분했을 것이나 생지와 곤지가 결국 금수저, 흙수저로 쉽게 이해되었다. 차이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그것을 토대로 최선책을 찾는 것이 중요하다.


대개는 적과의 뺄셈에서는 우선적으로 그리고 효율적으로 "흙수저를 몰아내는 것"이 적과를 잘하는 일이다. 그러나 흙수저라고 항상 같은 대우를 받는 것 만도 아니다.  우선 나무 수세에 비하여 사과가 적을 때는 수세 유지를 위하여 흙수저 금수저를 따질 여유가 없이 모두가 VIP이다. 또 금수저가 상처가 났거나 흠이 있을 때 적정 수를 위하여 business class로 업그레이드된다. 또 사진에서 처럼 금수저도 적절히 관리하지 못하면 흙수저 가 된다. 또 금수저든 흙수저든 관계없이 현재까지 선발된 선수들이 다 결승점에 도착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일단 선발이 되었으면 결승점에 도착하는 선수들이 모두 금수저다.


적과를 하면서 나는 금수저인가 혹은 흙수저인가를 생각해 보았다. 사과와는 달리 사람은 시간에 따라 위치에 따라 그리고 마음 상태에 따라 금수저, 흙수저의 신분이 변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모든 출연배우가 모두 주연이 될 수 없다는 것과 그 주연배우가 왜 내가 아닌지를 애통해하지 않는다면 금수저 거나 흙수저 거나 상관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은 수확이 되든 적과가 되든 끝이 오는데 그때까지 당당하게 즐겁게 지낼 수 있다면 그게 축복이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작업을 하다가 귀가하였는데 내가 즐겨보는 "성장판 * 시 필사 모임"에 오늘의 주제에 딱 맞는 시가 올라와 있었다.


" 작은 것들에서 아름다움을 보면 조금씩이나마 삶은 완전해지지 않을까"


그리고 요즘 내가 즐겨듣는 노래도 덤으로...
https://youtu.be/N5RIfTn5WU0


매거진의 이전글 3차 적과와  세상 사는 요령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