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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과농부 세네월 Aug 11. 2019

머하고 살았니껴?

두 번째 봉화지역사 전시회를 다녀오다.

전시회의 규모는 크지 않다, 약 백 명이 들어가면 꽉 차는 억지춘양주민문화교육센터 2층 강당에서 열리고 있다. 크지도 않은 동네 지역사 전시회에 다녀와서 기록을 남기는 이유는 돈도 안되고 그렇다고 많은 관람객이 몰리는 것도 아닌데 생업이 있는 사람들이 날밤 새며 지역사의 흔적을 정리하는 노고를 마다하지 않는 정성과 그들이 아니었으면 몰랐을 과거 사실들을 보며 이런저런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원래 나이를 먹으면 말이 많아진다는데 전시대상이 흘러간 옛일이니 어찌할 말이 없으랴.


1. 지역사박물관사회적협동조합 이란?

전시를 주관하는 이들은 대부분 아는 사람들이다. 고전읽기 모임에서, 독서모임에서 또 마을 걷기 모임에서 만나고 같이 활동하는 사람들이다. 나 포함하여 그들 모두 솔방울회 회원들이고 전술한 모임들은 솔방울회 소모임이기도 하다. 지역사박물관사회적협동조합은 인적 구성은 솔방울회와 대부분 겹치지만 다른 조직이다.

이 긴 이름의 협동조합에 대한 설명은 아래 사진으로 갈음한다.

이 협동조합은 봉화지역사박물관을 설립하고 봉화 지역사 연구를 위한 순수 민간주도 조합으로 작년에 처음으로 "머하고 살았니껴?"를 주제로 춘양농협 2층 강당에서 전시회를 개회하였고 이번이 두 번째로 사진과 기록 위주로 60-70년대를 돌아보았다.

첫 번째 전시회에서는 실제 물건들을 안방, 사랑, 부엌 등의 주제로 실제 물건들을 전시하였는데 이번 전시는 사진과 기록을 위주로 하였다. 개인적으로 물건들이 전시된 지난 전시는 여러 곳에서 보았던 옛날 물건들이어서 그 물건들이 주는 만큼의 느낌만을 받았지만 사진과 기록으로 보는 이번 전시회는 더욱 생생하고 여러 생각을 하게 한 전시회로 내가 사는 이 지역에 대해 확실하게 더 알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왼쪽 포스터에서 앞산이 아직은 많이 헐벗고 있다. 지금은 저런 산은 우리나라 어디에도 없다.

2. "머하고 살았니껴?"에 대한 설명


3. 전시내용 몇 가지

- 봉화 지도

민족의 명산인 태백산은 지금은 강원도 소속이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봉화군 소속이었다는 것을 옛 지도를 보고 확인할 수 있었다. 명치 43년 11월 29일 (1910년, 한일합병조약은 1910.8.22이지만 이때가 이미 테라우치 통감이 3대이므로 사실상 실질적인 지배는 1905년 을사조약부터 시작되었을 것이다.) 작성된 봉화군 지도에는 지금은 영월군 상동면이 봉화에 소속되어 있다. 소속 면장의 좌우명과 성명을 기입하고 날인까지 한 이 지도를 보며 합병 후 3개월 남짓에 이 먼 벽두 시골까지 완전하게 장악하고 있는 것처럼 느끼게 하는 일제의 흔적이 놀라웠다. 

-   봉화의 삶

봉화의 인구 정점은 66-67년 12만 명, 현재는 32,502명 ( 2019. 7월 말 현재). 학생수는 초중고생 합쳐 3만에 가까웠던 70년대, 지금은 2,228명. 60-7년대 농업종사자는  가구수의 70%를 넘었지만 2019년 전업농가수는 전체 가구수의 25% 수준임.  인구수는 전성기의 25% 수준이고 학생수는 70년대의 7.5% 밖에 안 되는 것은 요즘의 저출산 문제와 도시로 유학 보내는 추세는 예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으므로 넘어간다고 하더라도  최근까지 오지로 불리던 시골인 봉화의  농업종사 가구수가 25% 밖에 안된다니 이해가 안 가지만 현실이다.


- 새마을운동

새마을운동일지와 사진 등 자료를 보면서 당시에 살았던 사람들에겐 "새마을운동"이 어떤 느낌을 주었는지가 궁금했다. 내게는 영화관 대한뉴스 혹은 TV 뉴스를 통해 듣던 "새마을운동"이지만 어떻게 보면 관주도의 마을 공동사업으로 개인의 선택이 제한된 전제적 분위기일 수도 있겠고 숙원사업에 정부지원이 나오니 즐거운 마음으로 변화를 주도하는 분위기 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예전엔 미디어의 후광으로 후자로만 생각했었다.


-봉화의 풍경

예전의 초가집과 저 멀리 있는 기와집의 풍채가 당당해 보인다. 우측의 사진은 시멘트를 지원받아 다리는 설치했으나 지붕은 아직 초가지붕 그대로이다. 그 후에 이어진 지붕개량사업으로 초가집은 슬레이트로 대체되었다. 80-90년대 생활이 나아져  야외에서 고기를 구워 먹을 때 평평한 슬레이트 조각은 기름까지 빨아드려서 환상적인 고기불판이었다. 이번에 오래된 창고를 허물어 30장의 슬레이트가 나왔는데  공해물질 처리업체에 80만 원을 주고 처리하였다.

대원상회 앞에서 버스를 기다리는 듯한 여학생들. 왜 남학생이 없을까 궁금했다. 아마도 그 당시 분위기로는 남학생들은 대구나 서울 등으로 유학을 많이 보내서가 아닐까?라는 생각도 했다. 우리 마을의 어떤 분은 남동생들은 대학까지 갔지만 정작 자신은 여자라고 초등학교만 나왔다고 한탄을 했다. 어쨰거나 그녀의 아들은 지금 교장이고 사위도 교장, 따님은 선생님. 지금 우리 동네는 강을 건너는 다리가 있지만 예전엔 줄배를 타거나 얕은 곳을 골라 옷을 걷어 부치고 건너  다녔다고 한다. 4km 떨어진 면소재지에서 비료를 배급받아 머리에 이고 날르며 농사짓던 시절이었다.


4. 관람후기


고생하며 준비한 이들의 노고에 감사하는 마음이 들었다. 봉화의 60-70년대에 대해 알게 된 것도 고맙지만 전시회를 보며 그때의 나를 생각하고 내 주변인들과 환경을 생각하는 시간을 돌아보게 한 것도 고마웠다. 준비하는 이들에겐 고역이겠으나 세 번째 전시회는 어떻게  준비가 될지가 궁금하다.


나는 올해 6년 차인 사과농사 전까지 서울을 떠난 적이 없이 1960년부터 학교생활을 시작했다. 60년 전이면 먼 옛날이긴 하지만 살아온 이들에겐 위의 옛 사진들 하나면 금방 다가오는 세월이다. 60년대 중후반 그 당시 미국과 유럽을 여행하고 오신 선생님이 보여주신 슬라이드와 그리고 "미국에서는 농부가 일하러 나갈 때 자가용차를 가지고 간다"는 말에  왁자지껄 웃었던 기억들. 청계천 헌책방에서 구입한 "김찬삼 여행기"는 심심하면 펴 들며 나도 갈 수 있을까를 생각하곤 했었다. 개인의 행복지수와는 별개의 일 이긴 하지만  그간의 우리의 삶과 관계된 외형적 변화는 60-70년대 우리가 생각하던 이상의 수준이라고 본다. 그러나 현재 주변 여건이 구한말 시대와 비슷하여 걱정이 많이 되는 데다 세계적으로도 모두가 자기 이익만을 외치며 파이를 키우는 것이 아니라 축소시키는 방향으로 가는 것 같아 여러 가지로 심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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