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회 봉화 마을길 걷기: 워낭소리 촬영지 - 봉화읍내
올봄에 사과꽃 핀 이후 처음으로 봉화 마을길 걷기에 참석했다. 어디든 터를 잡고 살면은 내가 사는 동네와 주변지역을 알고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런 의미에서 내가 사는 봉화를 아는 데는 이 프로그램을 능가하는 방법이 없다. 걸어서 가면 보이는 것도 다르고 아는 것도 다르다. 게다가 밴드지기의 가는 길에 있는 여러 곳의 유래와 설명까지 곁들이니 한 번만 지나가도 수백 번 차로 지나가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이 알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밴드지기의 오늘 코스에 대한 설명은 다음과 같다.
2019년 11월 걷기 일정(서른네 번째)
◆일시: 2019. 11. 23.(토) 09:30시
◆코스: 워낭소리 촬영지-산정마을-구양 서원-거촌리 쌍벽당 등-봉화사 동 추원재-면소 골-봉화읍내(5㎞ 남짓, 3시간 이내)
◆집결: 워낭소리 촬영지[경상북도 봉화군 상운면 산정길 84-35/(지번) 경북 봉화군 상운면 하눌리 726-1]
◆준비물: 물, 간식 등. 점심은 내려와서 봉화읍내에 있는 ‘영점 식당’에서 칼국수나 만둣국으로 먹을 예정입니다. 아는 분만 아시는 맛집입니다.
이번 걷기는 평탄하지만 의미 있는 길입니다. 지금의 신작로가 생기기 전에는 사람들이 내성으로 들어오기 위해 주로 이용하던 길입니다. 시간을 거슬러 조선시대, 혹은 그 이전으로 시간 여행을 해 보시는 것도 괜찮을 듯합니다. 거의 오르막 같은 오르막이 없는 길이니 다리 걱정 않으셔도 됩니다.
[지명유래]
◆산정: 서기 1700년경 안동 권 씨가 이 마을에 살기 시작할 때 퇴계 이황 선생이 이 마을을 지나다가 목이 말라 길 옆 우물물을 마신 후 산중의 물맛이 아주 좋아서 산정이라 하였다 한다.
◆마 우골: 산정 남쪽에 200여 년 전 청송 심 씨가 개척하여 한 곳에 산다고 마 우골이라 불렀다고 한다. 옛날부터 우물도 없고 개울도 없어 매우 건조한 땅이라서 건재, 그리고 샘이 좋아서 세네미, 역시 찬물이 많이 난다는 참새미골 , 도적이 많았다고 도장골, 그리고 언골, 재궁골, 셋 골, 땅골, 세네 골, 산 너머 동래 골이 있다.
◆워낭소리 촬영지: 다큐멘터리 영화 ‘워낭소리’로 익히 알려진 곳. 주인공인 할아버지도, 소도 이미 세상을 떠났지만 여전히 가슴에 묵직한 슬픔으로 남아 있는 영화이다. 지난 7월에 화재가 나 영화의 주무대인 주택이 전소했다는 안타까운 소식이 있다.
◆내 거촌: 1300년 경 광산 김 씨(光山金氏)의 이 마을 입향조인 쌍벽당(雙壁堂) 김언구(金彦球) 선생이 이 마을을 개척할 당시 황촌(荒村)이라 칭하였는데 현재 쌍벽당 앞마당에 큰 나무가 있어 거수촌이라 불리다 현재는 거촌으로 불리고 있다.
◆외거촌: 광산 김 씨(光山金氏)의 외척인 전주 이 씨(全州李氏)와 외 외척(外外戚)인 원주 변씨(原州邊氏) 변영순(邊永淳)의 후손들이 많이 사는 곳으로써 외척이 많이 산다고 하여 바깥 거촌 또는 외거촌(外巨村)이라고 한다.
◆사라 골: 외거촌에서 구동마을로 가는 사이에 있는 경사가 급하고 높은 곳에 위치한 마을로서 큰 비가 오면 뒤 계곡에서 모래가 떠내려 온다 하여 사래이라는 지명이 붙었다고 전한다.
◆구동(龜洞): 1760년경 이 마을에 당을 지으려고 터를 잡을 때 이 터에서 발견된 돌 밑에 구(龜) 자가 쓰여 있어서 구동이라 불렀다고 한다.
◆거촌리 쌍벽당 : 중요 민속자료 제170호(1984. 01. 10)인 쌍벽당(雙碧堂)은 연산군 때의 성리학자인 쌍벽당(雙碧堂) 김언구(金彦球)를 기리기 위해 1566년에 건립한 정자이며, 안채는 김언구(金彦球)의 부친인 죽헌(竹軒) 김균(金筠)이 1450년에 건립하였다 한다. 7칸 규모의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마당을 사이에 두고 정면 하여 口자형(字形)의 정침(正寢)이 자리 잡고 있으며, 마당의 왼쪽에는 2칸 규모의 아래채를 두었다. 정자인 쌍벽당은 사랑채 뒤 오른쪽에 나란히 배치되어 있고, 쌍벽당 뒤에는 방형의 토석 담장을 두른 사당이 별도의 공간을 형성하며 자리 잡고 있다.
◆면소 골: 고려시대에 고창군(古昌郡, 현 안동)에 속했다가 1401년 내성현(奈成縣)에 속하게 되었으며 1914년 내성(乃城)으로 칭하여 오다가 1920년경 포저리(浦底里)로 불리었으며 내성 면사무소가 설치되면서 면소 골로 불리게 되었다.
◆봉화사 동 추원재: 충재(冲齋) 권벌(權橃)의 손자인 권래(權來)의 묘소를 관리하기 위해 건립한 재실.
나는 늘 내가 우물 안 개구리라는 것을 잊고 산다
봉화로 이사하고 며칠 안되어 워낭소리 촬영지를 방문한 적이 있었다. 그때는 불이 나기 전이어서 사람 없는 옛집이 남아 있었다. 지금은 불이 난 후에 새로 집을 지어 미술을 전공한 아드님이 살고 있고 개방을 하지 않는다. 이미 주인공과 소, 그리고 옛집이 없어져 개방할 이유도 없다. 워낭소리가 장안의 화제가 되면서 주인공의 자식들이 뭇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부모를 고생시키는 불효라는 비난이 쇄도하여 감독이 그 자식들에게 많이 미안해하고 곤혹스럽다고 말하는 기사를 본 기억이 있다. 사실 나도 불효까지는 아니어도 부모가 너무 고생을 한다고 생각하며 자손들이 힘든 상황인 것으로 짐작을 했었다. 그러나 시골에서 농사짓는 부모를 효도한다고 도회지의 아파트에 모신다는 것은 거의 보호감호소 수감과 같은 것이라는 것을 그때는 지금처럼 피부로 느끼지 못했다. 나는 그저 내가 보는 관점에서 상황을 단순화시켜(의식하지 않고) 쉽게 결론을 내렸던 것이었다.
이제 겨우 사과 농사 6년 차이면서 혼자 있는 때가 대부분인 지금도 서울 와서 살라고 하면 못 살 것 같은데 그분들에게 같은 제안을 했다면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었을 것이다. 소도 죽고 주인공 할아버지도 돌아가셨으니 가족과 관중 입장에서는 슬픈 결말이지만 할아버지 입장에서는 고생했던 소도 잘 묻어 주었고 당신도 요양원 신세 안 지고 움직일 수 있을 때까지 내가 살던 그대로 살다 가는 것이 얼마나 좋은 선택받은 결말인가? 최 씨 할아버님 입장에서는 복 받으신 것이다. 나도 그런 복이 있으면 좋겠다.
말이 안 통하면 마음이 통한다?
주인공과 소의 관계 또한 마음을 울리는데 삼십여 년의 세월을 함께하며 말이 안 통하지만 마음은 통한다고 느끼게 하기 때문이었다. 소가 죽고 할아버지는 집에서 1킬로 족히 됨직해 보이는 곳에 소 무덤을 만들어 주었고 오늘 도보코스 중에 소 무덤을 가리키는 간판을 보았다. 오랜 세월 같이 하면서 눈빛과 짧은 기함으로 소통이 가능했던 것은 역설적으로 말이 안 통하였기 때문이 아닐까 라는 생각을 했다. 같이 한 세월의 길이가 관계의 심도를 결정하는 것이 아닌 것은 분명하다.
아주 가까운 것이 기실 아주 먼 것 일 수도, 외거촌과 내 거촌
워낭소리 촬영지를 지나 높지 않은 고개를 넘으면 봉화의 진산인 문수산을 배경으로 잘생긴 기와집 동네가 외거촌으로 1544-5년경부터 거주한 원주 변 씨의 수온당 고택 (1653년 건립)을 중심으로 한 변 씨 집성촌이고 바로 그 옆이 1505년 입 향한 광산 김 씨의 내 거촌으로 쌍벽당 종택 (1566년 건립)이 중심이다. 먼저 들어온 광산 김 씨의 권유에 의해 외척인 원주 변씨가 들어온 것으로 출발점은 당시 양쪽의 원만한 관계에서 시작되었을 것이다.
두 마을은 외부에서 보기에는 한 마을로 보이지만 이름도 외거촌 내 거촌으로 다를 뿐만 아니라 각각 거촌 1리와 거촌3리로 행정적으로도 분리되어 있다. 이는 마을은 붙어 있으되 골목길은 이어져 있지 않은 심리적으로 먼 거리 때문 인 것으로 이해했다. 처음에는 좋았지만 갈수록 멀어지는 관계는 흔하다고 할 수도 있지만 워낭소리 촬영지에서 사람과 소의 소통을 생각하며 걸어온 길이어서 변화하는 관계에 대한 서로 다른 방향과 주체에 관해서 생각하게 하였다.
양쪽 마을 간의 관계와는 상관없이 각각의 종택 주인들은 친절하고 너그러워 집안 곳곳을 돌아보았고 여러 질문에 친절하게 응대해주셔서 마음 편하게 집 구경을 하였다. 고가 방문은 언제나 즐거운 경험인데 주인의 정까지 같이하면 금상첨화다. 더 천천히 둘러보었어도 좋았을 텐데...
저 좀 조수로 써주세요.
농사꾼은 무소불위의 해결사가 되어야 하는데 용접과 목공기술과 약간의 기계설비에 대한 기술이 있으면 된다. 유감스럽게도 나는 그 어느 하나와도 친하지 않은데 외거촌의 어느 예쁜 아담한 한옥에서 그런 분을 만났고 저 좀 조수로 써 달라고 부탹을 했다. 조만간 다시 방문하려 한다.
약 6km를 3시간에 걸었는데 짧지만 여러 가지 다른 볼거리로 더 천천히 다녔으면 더 재미있었을 코스가 늦가을의 정취와 어울려 멋진 도보여행을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