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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과농부 세네월 Nov 10. 2019

적은 게 많은 거야, 바보야!

2019년 농사 반성 1.

과원 나무 사이  거미줄에 매미의 잔해가 걸려있다. 한창일 때 몸집과 속도를 생각하면 매미가 저렇게 거미줄에 걸려있다는 것이 이해가 안 되는 일이지만 그것이 자연이다. 일견 불가능한 일도 당시의 상황과 조건에 맞으면 일어난다. 굵게 얽힌 거미줄과 떨어진 날개 한 장이 매미의 마지막 사투를 여실이 보여준다. 대개 거미는 거미줄에 걸린 먹이를 거미줄에 둘둘 말아 걸어두던데 이 매미의 경우는 포장비가 더 들어 포기했을 수도 있다.  매미 입장에서는 참 황당하고 창피한 일인데 6년 차 농사인 올해 농사를 마감하는 내 사정이 비슷하다.

줄어든 수확량은 두 번의 태풍과 노쇠한 성목의 효율 저하로 핑계를 댈 수 있지만 올해 부사의 첫 수확량이 전체의 35% 정도밖에 안된다는 것은 마땅한 핑곗거리가 없다. 

8월 말에 시작한 쓰가루, 9월 초 올해 3년 차 홍로를  9월 말 시나노 골드 그리고 10월 말/11월 초 부사를 수확하며 계속 머리에 맴돈 말, " 적은 게 많은 거야, 바보야!".


사과꽃은 대여섯 개의 열매가 착과 되고 그중에 제일 먼저 핀 꽃에서 생긴 열매를 남기고 따버리는 1차 적과작업과 거리와 수세에 비례하여 적정량의 열매만을 남겨 놓는 2차적과 작업을 한다. 여기까지는 도와주는 인력이 필요하고 올해 약 25인분의 노동이 필요했다. 그리고 3차 적과는 과원 주의 몫이다. 나무 하나하나의  적정 착과량을 결정하는 것은 과원주의 책임이다. 그리고 수확하는 시점까지 오며 가며 살펴서 빠트린 열매솎기나 이상 징후가 있는 열매 제거 등의 적과를 해야 한다. 그렇게 최종 수확량이 결정된다.
즉 1. 과원주의 의도와 수세에 맞는 적정 착과량과    2. 수시 관리가 어우러져 좋은 결과가 나온다.


1. 과원주의 의도와 수세에 맞는 착과량

어려운 말들은 아니지만  정확한 뜻을 꼬집어 말할 수 있는 말도 아니다. 무리를 안 하고 많이 안 달겠다고 생각하고 적과를 했지만 올해도 결국 사람을 사서 다시 적과를 하여 30-40 상자 땄다. 미리 적과를 하였다면 그 40 상자만큼의 분량이 나무에 달려있는 사과로 갔을 것이지만 결국은 땅에 묻혀 비료가 되었다. 작년에 20 상자 정도 수확한 3년 차 홍로를 달라는 사람이 많아  많이 다는 방향으로 적과를 했다. 개수는 많아졌지만 크기가 작은 것이 많아 상품과 가 적었다. 결국은 많이 달았다고 결과물이 많아지는 것이 아니다. 


나와 같이 유목을 시작한 K는 첫 일 년 물이 부족하여 나무가 고생을 하였지만 올해 홍로에 지극 정성을 다하여 꽃눈 솎는 적뢰 작업부터 시작하며 착과수를 줄여 소수정예 정책을 지향하였다. 그리고 꾸준히 신경을 쓰며 돌본 결과 상품성과 상품과 가 환상적으로 좋았다. 


적과는 적은 듯하게 해야 많은 상품성 있는 사과를 만든다. 결국 적은 게 많은 것이다.

몇번을 돌아도 우측사진처럼  제대로 솎지 못해 착과된 5개의 사과가 각자도생하였다.


2. 열매는 농부의 발자국 소리를 듣고 큰다.

 올해는 일주에 한번 하는 마이스터 과정도 끝나서  비교적 꾀 안 부리고 농원에 있는 시간이 어느 때 보다도 많았지만 과일의 질이 과원 주의 과원 체류시간과 직접적인 상관관계를 갖기 위해서는 과원 주의 안목과 실력이 뒷받침돼야 한다.


우리 동네의 어느 사과밭(약 4천 평)은 그 주인이 밭에서 30km 떨어진 곳에서 살고 그 동네에 6천 평의 사과밭이 또 있다 게다가 다른 농사도 있다고 한다. 그러니 그는 평소에는 밭에서  보기 힘들고 필요한 시기에  필요한 작업을 하기 위해 밭에 오는데 그의 수확량이나 품질이 뒤떨어지지 않는다. 그들 부부가 일하는 것을 보면 "일머리"가 있는 사람들이라는 생각이 든다. 즉  사과나무의 생리, 필요 작업의 방법과 절차 등에 대해 나름대로의 비결을 갖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결국 열매가 듣고 크는 발자국 소리는 지나가는 행인의 소리와 구분되는 농부의 발자국 소리여야 한다. 행인과 농부의 차이는 사과에 대한 일머리의 차이인데 우리 밭의 나무는 나를 가끔 행인으로 보는 것 같다. 유감스러운 것은 그 점에 대해 강력하게 반론을 제기할 만한 입장이 아니라는 것이다.
여러 번 돌며 유심히 살폈다고 생각했는데 결국은 나는 내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다닌 셈이다. 냉정하게 올바르게 적과가 되었는지, 착과량이 많지 않은지를 따져 봤어야 했다. 제대로 본다는 것은 어떻게 보는 것일까?


책상에 오래 앉아 있는다고 시험 잘 보는 것이 아니다.


모르던 것을 새로 배운 것이 있었던 것도 아닌데 내가 만든 결과물 앞에 서면 왜 이리 작아지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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