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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사과농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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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과농부 세네월 Nov 03. 2019

이 가을에 사과꽃이 핀다.

철없는 꽃을 위한 철없는 생각.

6년 차 사과농사에 처음 해보는 일이 두 가지가 생겼다, 태풍 피해 수습과 가을에 사과꽃 따기.


농사를 시작한 이후 몇 번의 태풍이 지나갔지만 나무가 넘어지고 많은 사과들이 떨어진 것은 처음이었다. 많다고 했지만 재해보험의 자손 분담금 수준이어서 "감당할 만한 피해"에 감사해했다. 나무도 좀 넘어졌지만 천여 그루 중 수십 그루니 그 역시 "감당할 만한 피해"로 간주했다. 이 정도면  태풍에 대한 수업료를 "아주 싸게" 낸 것이고 바람 방향으로 기울어진 일부 유목 밭의 지지대에서 전체적인 보강책의 필요성을 확인하였으니 그것도 중요한 깨달음이었다. 다만 수확기의 사과는 꼭지가 탈리되는 과정에 있으므로 더 많이 떨어졌고 그로 인해 미리 받은 주문을 이행하지 못한 것이 중요한 흠이었다. 그렇게 생각했었는데 막상 부사를 수확하면서 보니 사과가 바람에 흔들리며 가지에 긁힌 상처가 있는 것이 예상외로 많았다. 태풍 피해의 "아주 싼" 수업료를 "싼" 수업료로 정정했다.


우리나라의 사과는 예전에는 "국광"이나 "홍옥"이 대표선수였으나 지금은 단연 "부사"가 대세다. 대략 사과재배면적의 70%를 차지한다고 하는데 사과의 맛을 좌우하는 당도와 산비가 좋고 저장성 또한 좋으니 당연한 일이다. 생육적인 측면으로 보면  8월에  수확하는 "쓰가루", 9월의 "홍로" 그리고 10월 말/11월 초에 수확하는 "부사"의 꽃 피는 시기는 단지 일주일 이내의 차이일 뿐이다.  거의 같은 기간에 열매를 맺지만 수확은 최장 두 달 이상 차이가 나니 더 오래 달려있는 부사가 맛이 있고 좋은 것은 공평한 일이다. 그러나 자연도 공평해서 부사는 아름답게 착색이 되는 것이 몹시 어렵다고 알려져 있다. 특히 "부사의 원조"인 "동북 7호"의 착색에 어려움이 있어서  많은 아조변이 ( 가지변이) 종을 탄생시켰다. "아조변이"는 생장중의 가지 및 줄기의 생장점에 발생한 돌연변이를 말하는데 이를 꺽꽂이나 접을 붙여 변이를 고착화시켜 새로운 품종을 만든다. 이렇게 착색이 촉진되는 변종을 "착색계" 부사라고 하는데 기꾸, 미얀마, 미시마, 피덱스, 로열, 하나, 후브락스 등 종류가 다양하다. 그러나 공짜가 없는 자연의 법칙에 의하여 착색을 얻은 대신에 식감이나 맛은 원조인 " 동북7호"를 따라가지 못한다. 우리밭에는 기존의 동북 7호와 내가 심은 후브락스 두 종류의 부사가 있는데 동북 7호의 착색이 늘 고민거리다. 특히 올해는 지역에 상관없이 착색이 안 좋다는 것이 대세인데 다행히 10월 하순 /11월 초에 기온이 따뜻하여 수확을 미루면서 착색을 기대하고 있는 중이다. 대개 11월 초순 이내에 사과의 최저기온 마지노 선인 영하 4도보다 추운 날씨가 있기 마련인데 11월 3일 현재 11월 12일까지 영하 1도를 넘지 않는다는 일기예보다.

덕분에 올해 주 수확기를 11월 초로 예년보다 일주일 늦게 진행 중이다. 늦은 수확으로 색을 어느 정도 얻은 대신 올해 처음 해보는 두 번째 일, "가을에 사과꽃 따는 일" 이 생겼다.  9월 초에 수확하고 엽면시비를 하여 겨울을 날 양분까지 챙겨준 홍로 나무들 일부에서 꽃이 피기 시작했다. 심지어 어떤 놈은 수정이 되어 열매가 달려있기 까지 했다. 내가 아는 바로는 식물에게는 상황판단을 하는 뇌가 없으니 식물의 꽃눈 생장점 세포 DNA에는 수많은 가지의 경우 수들이 장착이 되어 있을 것이다. 그중에 하나가 평균기온 x도가 x기간 계속되면 꽃을 피우라는 지시도 있을 것이다. 공짜가 없는 자연의 법칙에 의거 부사의 착색을 내년의 홍로사과와 바꾸는 결과가 되고 있다. 어디서나 헷갈리는 친구들이 있으므로 처음에는 웃어넘겼으나 여기저기서 꽃이 피기 시작하니 마냥 웃을 수만은 없게 되었다.

착과까지 된 홍로와 봄 같은 홍로, 각각의 사진에 빨간 부사와 수확용 노란 상자가 보인다.

내년의 사과를 위해서는 꽃눈으로 존재하여 충실하게 자라며 겨울을 나야 하는데 지금 꽃을 피우면 내년에는 사과가 없다. 다행히 모든 꽃눈이 움직이는 것은 아니고 홍로는 꽃눈이 많은 품종이어서 위안이 되는데 결과를 볼 일이다. 그러니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하여 당장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가 고민이었다.


봄에는 개화가 되면 열매를 위한 양분과 생존을 위한 잎과 가지용 양분이 동시에 필요하게 되고 양분이 충분치 않으면 열매가 떨어지게 된다. 이 가을에는 새로운 잎이나 가지를 만들지 않지만 쇠퇴기에 들어서 충분한 양분을 만들지 못하면  동식물의 최우선 과제인 후손을 만들기 위해서 나무의 영양소가 우선적으로 배당이 될 것으로 생각되었다. 적과를 하고 꽃을 따서 나무로부터 " 이벤트"를 없애 영양분의 배분기회를  봉쇄하자고 생각하였다. 그런 의도로 꽃을 따기는 했지만 사실 잘 모르겠다. 꽃이 피고 영양분을 배분하는 것은 나무가 하는 일인데 그 열매를 바라는 인간이 자기 생각대로 자기가 아는 범위에서 진단하고 실행하였으니 모르는 게 당연하다. 뭔가 했다는 약간의 "심리적 위안감"을 얻은 것에 만족해야 한다.  왜냐하면 한편으론 영양분의 낭비를 줄였을 수도 있지만 반대로 그 꽃이 없어지므로 해서 별 일이 없었을 다른 꽃눈들이 움직이기 시작할 수도 있다. 내가 한 행위가 나무에도 나에게도 도움이 안 되는 일 일수도 있으나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 변화가 금방 눈에 띄지 않는다는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이다.


꽃눈의 유전자에 각인된 여러 가지의 경우의 수는 달리 표현하면 프로그래밍인데 조물주의 프로그래밍 실력은 의심할 여지가 없지만 더러는 애매한 부분도 있어서 간절기의 모호한 날씨가 때 아닌 꽃을 피우게 한다. 어떤 꽃눈에게는 꽃을 피게 하는 조건이지만 다른 꽃들에게는 아니라면 동일한 코드가  각각의 상황과 여건에 따라 같은 조건이 다르게 해석되는 능동적인 프로그래밍 코드 일 수도 있다. 나는 아무 근거 없이 순전이 내 생각만으로  "애매한 부분"이라고 표현하는 조물주의 프로그래밍 여백은 그 프로그래밍을 부여받은 당사자가 채워 넣는 부분으로 여긴다. 즉 내게 주어진 환경과 나의 경험, 학습에 의해 그 여백 혹은 애매한 부분들이 정의되고 정리되어 채워져 간다고 믿는다. 조물주가 나를 위해 마련한 프로그래밍을 더욱 세련되게 만드는 것이 내 일이고 삶이며 그 코드는 후대에서 더욱 세련되게 다듬어질 수도 있겠다. 이 가을에 철없는 꽃을 따며 하는 철없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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