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억의 방식
어떤 순간은 지나간 뒤에야 모양을 갖춘다. 그때의 공기는 손끝에 남아 있었고, 입술을 스치던 말들은 아직 식지 않은 채 어딘가에 얇게 눌어붙어 있었다. 시간이 한 겹 더 내려앉는 동안 장면은 내게 불리한 각을 덜어내 모서리를 둥글게 만들고, 감정은 그 둥근 자리들 사이로 다시 흘러 들어가 제 몸을 숨긴다. 그래서 어떤 일은 문득 '그런 일이 있었던가' 싶은 얼굴로 바뀌기도 한다. 반대로 또 어떤 일은 또렷한 윤곽을 놓지 않은 채 지워지지 않아 이따금 내 앞에 그 모습을 드러내 일상의 균형을 흔들어 놓는다. 지나간 하루가 다시 내 앞에 서는 방식은 늘 그런 식이다. 날것의 현실이 아니라, 나중에 선택한 형태로. 아마도 내가 감당할 수 있을 만큼의, 딱 그 정도의 짙은 농도로.
사람들은 흔히 기억을 진실의 저장고처럼 말하곤 하지만 실은 그 반대에 가깝다. 내가 내 안에 남아 있는 것들은 사실의 원본이라기보다, 원본이 한 차례 지나간 뒤 가라앉은 잔여물에 가깝다. 어떤 장면이 나에게 오래 남아 있다는 이유만으로 그것이 가장 정확하다고 믿는 순간, 나는 내 마음이 만든 각본을 현실의 기록으로 착각하게 된다. 서랍 속 사진이 서서히 빛바래는 동안 그 안에 담긴 인물의 표정만큼이나 내 설명도 달라지고, 언제나 그럴듯한 이유를 곁에 두고 앞으로 미끄러진다. 일부러 모른 척하려는 의도가 아니라 인간이 시간을 견디는 방식이 애초에 그런 쪽에 더 가까운 탓일지도 모른다. 나는 언제나 나를 지키는 편을 택해 왔고, 그 선택의 끝에서 종종 왜곡과 손을 잡는다.
이것은 거짓말과는 다르다. 거짓말이 의식의 표면에서 방향을 고른다면 왜곡은 훨씬 깊은 곳에서 손을 뻗는다. 나는 무언가를 꾸밀 생각조차 하지 않았는데 어느새 다시 덧칠되어 있는 장면이 보인다. 지금의 나에게 어울리도록 성격을 조금씩 바꾸어가며 입는다. 어떤 날에는 유난히 선량한 얼굴을 하고 나타났다가, 또 어떤 날에는 지나치게 비열한 모습을 보여준다. 그 양극 사이 어딘가에서 '그럴 만했다'는 결론을 내려버리고, 이렇게 만들어진 결론은 마치 단단한 매듭처럼 쉽게 풀리지 않는다. 사람을 자기 자신 편에 서게 만드는 마지막 장치에 가까운 탓에 한 번 고정된 뒤에는 웬만한 반박쯤으로는 자리를 내주지 않는다. 그래서 가끔은 내 안에 남아 있는 장면보다 그 장면을 둘러싸고 덧붙여진 해설 쪽이 훨씬 단단해 보이기도 한다. 장면은 이미 색을 잃어가는데, 해설만이 또렷한 윤곽을 유지하는 기묘한 역전 속에서.
그러나 이 해설이 늘 내게 유리한 쪽으로만 흐르는 건 아니다. 마음은 스스로를 보호하겠다는 명분 아래 나를 살려 두는 한편, 때로는 같은 손으로 나를 벌주기 위해 장면을 붙잡아 두기도 한다. 보통 사소한 실수 하나가 그 시작이 된다. 한 번의 흔들림이 곧 나의 본성인 것처럼 확대되고, 잠깐의 부끄러움이 평생을 따라다닐 낙인처럼 반복 재생되는 쪽을 선택하는 순간들이 분명 존재한다. 그렇게 어느 한 시절을 통째로 실패한 나로 부르며 정리했다. 이름표 아래에는 복잡했을 표정들과 망설임들을 밀어 넣은 채 설명하기 쉬운 몇 개의 단어만을 남겨 두었다. 쉬운 단어는 언제나 삶을 단순하게 보이게 만들어준다. 단순해 보이는 삶은 다시 그 해설을 확신으로 밀어 올린다. 이 순환이 한 번 궤도를 얻으면 생각은 스스로를 증명하기 시작하고 나는 그 증명의 고리 안으로 조금씩 말려 들어간다. 그렇게 만들어진 고리는 어느새 안과 밖의 밖의 구분을 흐리며 내가 선택한 길이 아니라 나에게 주어진 운명처럼 받아들여, 기어이 그 착시 속에 나를 끼워 넣고 만다.
세상이 말하는 비밀의 신화를 본 적이 있는지 물었다. 세상에 영원한 비밀은 존재하지 않아. 오래 숨겨진 것들조차 언제가 그 모습을 드러내 결국 모든 것이 밝혀지게 될 거야.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수는 없는 법이지. 이 모든 말든은 정의를 품은 희망이나 마찬가지다. 시간이 알아서 해결해 줄 것이라는 말과 닮은 얼굴을 하고 있다. 하지만 드러나지 않은 것들이 사라졌기 때문이라고 말하기에는 이 세계는 생각보다 많은 장면을 품은 채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지나간다. 밝혀지지 않은 것들의 상당수는 숨겨졌다기보다 애초에 질문의 대상이 되지 못한 채 시선 밖에 머물러 온 것들에 더 가깝다. 무언가가 존재한다고 믿게 되는 과정 역시 단순하지 않다. 우리는 보았기 때문에 믿고 배웠기 때문에 안다고 믿지만 그 말은 곧 시야에 들어온 것들만을 기준으로 세계를 재단하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보이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상상조차 허락되지 않은 것들은 존재의 바깥으로 밀려난다. 그러니 믿음은 숫자의 문제가 아니다. 다수가 고개를 저을 때조차 어떤 이는 그것을 진실이라 붙들고 살아가고, 소수가 입을 모을 때에도 또 다른 누군가는 그것을 거짓이라 치부해 등을 돌려버린다. 드러나지 않았다는 사실만으로 어떤 이야기를 곧장 음모로 밀어 넣기에는 우리의 시선이 닿는 범위가 지나치게 좁다. 비밀이 유지되는 이유는 누군가의 관심에서 오래 벗어나 있었기 때문이고, 침묵 역시 악의에서 태어났다기 보다 그 무심함이 반복되며 만들어 낸 흔적에 가깝다. 우리는 대체로 바쁘다. 하루를 건너는 일만으로도 숨이 가빠, 누군가의 마음속 깊은 방까지 발걸음을 옮길 만큼의 여유를 쉽게 내어주지 않는다. 때로는 들어가고 싶다는 마음이 있어도 어디에서 손을 뻗어야 문이 열리는지 알지 못해 멈춰 서게 된다. 그렇게 망설이는 사이에도 문은 사라지지 않고 그 자리에 남아 있다. 다만 나는 그 안에 무엇이 놓여 있는지는 알 수 없을 뿐이다. 비밀처럼 보이는 것들의 상당수도 그렇게 아무도 묻지 않은 방 안에서 자신을 숨긴 채 시간을 견디고 있다.
겉으로는 평온해 보이는 이 질서 속에서 예의와 배려는 지나치게 부드러운 얼굴을 하고 떠다닌다. 상처를 건드리지 말 것, 불편을 만들지 말 것, 분위기를 흐리지 말 것. 이런 규칙에 얽매어 타인을 대할수록 점점 스스로에게도 같은 규칙을 적용하기 시작한다. 모든 것에 '굳이'라는 태도로 일관하게 된다. 이미 지나간 일이잖아. 이제와서 무엇을 바꿀 수 있지? 그냥 괜찮아. 다 괜찮아. 회피와 침묵은 나를 보호해주는 듯 하지만 사실 아무것도 해결해주지 못한다. 정리되지 못한 것들은 시간에 의해 사라지기보다 반복된 태도를 먹고 자라나 점점 더 다루기 어려운 모양으로 굳어진다. 머릿속 어딘가에는 뒤섞인 채 쌓여 가는 것들이 있다. 무엇부터 손대야 할지 알 수도 없어서 차라리 문을 닫아 버린 공간. 이미 잊혔다고 여겼던 것들이 다른 형태를 하고 불쑥 내 앞에 나타난다. 가장 방심한 순간에, 전혀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나타나 발목을 붙잡는 식으로. 묻지 않음은 사라짐과 같지 않았다.
아무것도 묻지 않는 관계는 주로 가까운 관계에서 발견된다. 방심은 신뢰가 쌓여야 나타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상대의 표정만 보아도 그 생각을 알 것 같다는 착각 속에서 굳이 말로 확인하는 수고는 불필요하다. 나는 내가 이해한 대로 해석하고, 그 위에 상대의 그럴 법한 얼굴을 겹쳐 놓으며 관계를 이어간다. 그렇게 만들어진 모습은 편리하지만 곧 오해를 불로온다. 해석은 늘 나의 방향을 향해 기울어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오해가 쌓인 자리에서조차 우리는 또 다시 묻지 않기를 택한다. 이미 오래 알고 지내왔다는 사실이 질문을 대신해 줄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 저 사람은 원래 저런 사람이라는 단정이 자연스럽게 자리를 잡아, 그 관계를 더 이상 열어 둘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변화는 타인의 의지로 강요할 수 없는 것이면서도 스스로의 선택 앞에서는 놀랄 만큼 빠르게 일어나기도 하는 법이다. 이 간극을 건너는 대신 우리는 각자의 해설 속으로 물러나 버리고 말지만 말이다. 그래서 같은 시간을 공유하고 살았어도 서로 다른 서사를 들고 살아가게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한쪽에서는 이해라고 넘겨 부른 것이 다른 쪽에서는 오해로 남고, 말하지 않으 채 남겨진 부분들은 각자의 해설 속에서 점점 다른 모양으로 굳어져 간다. 모든 관계가 그렇다. 같은 장면을 바라보면서도 전혀 다른 이야기를 기억하는 상태로 이동한다.
특별하지 않았기에 더 오래 남아 버린 것들이 있다. 그 안에 담겨 있는 것은 아마도 나의 낭만이었고, 그것이 불러온 한 시절의 충만함이었을지도 모른다. 말이 되지 못한 감정은 나의 언어로 남았지만 소리로 옮기지 못한 채 가슴 한 켠에서만 맴돈다. 우리는 쉽게 무너질 것 같은 것들을 아름답다고 부르면서도, 그 아름다움이 상처받아도 괜찮을 것처럼 대하는 데에 그다지 주저하지 않는다. 경계가 흐릿할수록 더 쉽게 이름 붙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들을 각자의 언어로 번역하다 의도와는 다른 문장이 덧씌워지고 여백은 상상으로 채워진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든 것을 드러내며 살아갈 수는 없다. 그러기에 우리의 하루는 너무 거칠고, 변화는 지나치게 빠르다. 날아오는 평가 속에서는 하루도 자유롭지 못하다. 느리게 살아갈 여유조차 허락하지 않는 이 세계 앞에서 나는 종종 말하지 않은 채 남겨 두는 쪽을 택하곤 했다.
남겨진 것들은 어딘가에 보존된 진실로 남아 있지 않고 아무도 확인하지 않은 채 굳어버린 하나의 모습으로 남는다. 겉으로 드러나는 성격처럼 보이는 것들 역시, 실은 오래전에 덧붙여졌던 해설들이 층층이 쌓여 만들어진 잔여일지도 모른다. 이유를 모른 채 지나쳐온 장면이 나의 안에서 반복 재생될수록 그 음에 맞추어 자신을 조정해 간다. 뒤돌아 봤을 땐 그것이 내 선택이었는지, 습관이었는지도 분간하기 어렵다. 상황에 따라 다른 내 행동에 이해가 가지 않을 때가 있다. 하지만 대개는 이 모름을 불편해하지 않는다. 알게 되면 책임을 져야 할까 두렵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 모두 서로가 서로를 이해하지 못한다. 스스로가 스스로를 이해하지도 못한다.
여기까지 생각이 닿고 나면 드러나지 않았던 것들을 굳이 끌어내 밝히고 싶다는 욕망도 한결 느슨해진다. 밝혀지지 않았던 것들을 모두 꺼내 햇빛 아래 늘어놓는 순간, 나는 과연 더 자유로워질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그 의문이 드는 이유조차 단순하다. 자유로워질 수 없을 것만 같기 때문이다. 햇빛을 받는다고 모두가 환하게 피어오르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늘에 머물 때보다 더 빨리 시들어 버리는 것도 분명 존재한다. 다만 나는, 말하지 않음 그 자체가 아니라 말하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그것들을 없던 일처럼 취급해 버리는 것에 대해 더이상 동의하기 어려울 뿐이다. 보이지 않았다는 이유로 존재하지 않았다고 판단을 해버리고 나면 나는 내 삶의 상당 부분을 스스로 지워 버리게 된다. 내 안에는 방이 하나 있다. 미처 이름 붙이지 못한 방. 누구에게도 열어보인 적 없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곳. 드러내지 않았다 하여 거짓을 살았다고는 말할 수 없다. 누군가 묻지 않았다는 이유로 그 안에 담긴 이야기들이 곧장 허위가 되는 것도 아니다. 아직 말로 다 옮기지 못했을 뿐, 사라진 적은 없다.
나를 인정하고 나면 자연스럽게 타인을 향한 시선을 바꾼다. 누군가의 성격을 그저 성격이라는 말로 재단하기보다, 그 사람의 내부에도 아직 불리지 않은 방 하나쯤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먼저 든다. 그러면 관계의 방식도 조금씩 달라진다. 상대를 바꾸려는 욕심은 뒤로가고 대신 그 순간의 모습 그대로 바라보려는 마음이 생긴다. 의심을 앞세우기보다 믿음쪽에 무게를 두는 일은 결국 나를 위한 일이나 마찬가지다. 끊어질까 두려워 애써 잇지 않는 선택은 결국 아무와도 연결되지 못하게 만든다. 그래서 나는 모든 것에 함부로 결론을 내리지 않으려 한다. 화려하지는 않지만, 그만큼 숨을 고를 여지가 남아 있는 삶. 어쩌면 우리가 바라는 것은 늘 그런 여백에 더 가까웠는지도 모른다.
내 삶은 아마도 정확한 원본으로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수많은 해설을 겹쳐 씌운 끝에 내가 견딜 수 있는 만큼의 빛만 허락해 남아 있는 어떤 필름에 더 가까웠을 테다. 그 안에는 결핍도 있고, 공백도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모든 게 완전한 무(無)로 사라질 수는 없다. 애초에 모든 장면이 빈틈없이 꽉 채워진 기록을 원한 적 없었으니까. 내가 나에게 묻고, 타인에게 묻고, 때로는 결국 아무것도 묻지 못한 채 지나가더라도 그 모든 순간들까지도 나의 한 필름으로 남아 이 삶을 결국 한 편의 영화로 남길 것이다. 영화가 언제나 사실만으로 만들어지지는 않듯, 진실에 닿지 않았기에 더 오래 여운이 남는 장면들도 있다.
어느 계절은 지나간 뒤에도 자꾸만 다른 빛으로 되돌아온다. 말이 되지 못한 채 내부 어딘가에 눅진하게 엉겨 붙어, 내가 걷는 방향을 아주 미세하게 틀어 놓으면서 말이다. 그래서 모든 것이 낱낱이 밝혀진 완벽한 세계와 밝혀지지 않은 채 남아 있는 불완전한 세계 중 하나를 고르라면 나는 기꺼이 후자를 택할 것이다. 공백을 공백으로 인정한 채 아직 열리지 않은 문의 손잡이를 손끝으로 더듬어 보며. 언젠가 열릴지도, 아니 열리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그 문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이 삶에는 잠시 숨을 고를 여지가 남아 있다는 뜻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