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출(演出)

: 찬란한 찰나

by 유영

요즘의 세계는 복잡해 보이지만 결국 단순하다. 사람은 두 가지로 나뉜다. 첫 번째, 태생부터 완성형인 사람. 두 번째, 완벽하게 정리된 성장 서사를 가진 사람. 과정이 무엇이었든 도착지는 늘 하나다. 완벽한 결과.


SNS가 과도하게 발달하고 보여지는 것에 예민해진 이 시대에서는 어쩌면 당연한 흐름이다. 하루가 멀다 하고 눈에 들어오는 것은 전부 완벽해 보이는 인간들뿐이다. 허상이라는 걸 알면서도 눈앞에 보이는 이미지는 나의 현실이다. 그런 현실을 지켜보는 일은 괴롭고 피로하다. 그럼에도 멈출 수 없는 이유는 외면하는 순간 왠지 더 뒤처질 것만 같은 불안이 따라오기 때문이다.


과정마저 완벽해 보이는 그들이 되고 싶지만 그럴 수 없다는 걸 깨닫는 순간 사람들은 선망을 선택한다. 그 반열에라도 오른 기분을 얻기 위해서다. 그래서 선망은 늘 소비로 이어진다. 완벽한 존재가 될 수 없다면 그들에게 가까워졌다는 느낌이라도 사야 된다. 사람들이 기꺼이 돈을 쓰는 곳을 보면 대부분 비슷하다. 순간의 쾌락, 갖고 싶은 것, 보여주고 싶은 나. 이러한 선망의 구조는 방향만 다를 뿐, 위에서도 동일하게 작용한다. 부를 가진 이들이 가난을 탐하는 것처럼.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장 신성시되는 결과를 이미 손에 쥐었기에, 이제는 서사까지 완벽해지고 싶은 것이다. 공감을 얻고, 더 선망받고, 그로 인해 더 많은 욕망을 끌어당기기 위해.


하지만 선망이 반복될수록 서사는 빠르게 소모된다. 감동을 주던 가난 서사와 성장 서사 역시 예외는 아니다. 희망을 잃은 서사는 힘을 잃는다. 더 이상 밑바닥에서부터 올라갈 희망이 현실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그래서 사람들은 차라리 아예 뿌리부터 다른 인간을 찾는다. 애초에 달랐기에 나는 괜찮다는 안도감을 얻기 위해서다. SNS에서 완벽해 보이는 이미지에 집착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사실 여부는 중요하지 않다. 보여지는 것만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짧은 콘텐츠의 등장은 이 현상을 더 가속화했다. 긴 인생의 스펙트럼에서 찰나의 순간만 잘라 보면, 그 조각들은 언제나 완벽하다. 반대로 이야기가 길어질수록 사건은 생기기 마련이다. SNS는 그렇게 만들어진 완벽한 찰나의 환상 같은 것이다.


불안하게 지속된 환상은 균열을 만든다. 다만 그것이 모두에게 전가된다는 것이 문제다. 누가 타깃이 될지는 알 수 없다. 마치 러시안룰렛처럼 언젠가 내 차례가 올 수도 있다는 걸 알면서도 그 공포 속에서 버텨야 하는 현실은 사람들을 더 불안하게 만든다. 그래서 우리는 선택한다. 누군가를 선망하는 쪽이 되거나, 아니면 선망받는 대상이 되거나.


이런 선택들이 반복될수록 사회는 점점 더 불안한 방향으로 굳어진다. 완벽해 보이는 사람이 많아질수록 이 사회에 불안한 사람이 그만큼 많다는 것을 보여준다. 불안한 사람일수록 완벽에 더 강하게 끌린다. 하지만 성장은 본질적으로 완벽할 수 없다. 완벽한 서사는 브랜딩이고, 환상이다. 애초에 그렇게 소비되도록 만들어진 것이다.


성장은 늘 엉망이다. 흐트러져 있고, 남에게 보여주기엔 부끄럽다. 열심히 써 내려간 줄 알았던 인생을 돌아보면 완성작이 아니라 낙서장에 가깝다. 하지만 결국 나에게 의미를 갖는 것은 아무도 알아보지 못하는 그 낙서장이다. 가장 날것의 감정, 꾸며내지 않은 마음들이 담긴 그것들이 나를 만들고, 나를 살아가게 만든다.

그래서 모든 결과와 목표에 삶의 의의를 둘 필요는 없다. 삶은 성취보다 의미에 가깝다.


무언가 되기 위해 애쓰지 않아도 된다. 목표를 이루고 싶지 않은데도 억지로 달리지 않아도 된다. 그냥 되는 대로 살다가, 되는 내가 되면 그만이다. 목표를 굳이 정해야 한다면, 무언가 될 사람이 아니라 되고 있는 사람이면 충분하다.

세상이 건네는 괜찮다는 말들이 당장 처한 힘든 현실 속에서 아무런 위로가 되지 않는다는 것도 안다. 피어나는 계절이 다르다는 말 역시 때로는 무책임하고, 공허하게 들린다. 아직 피기도 전에 짓밟힌다면 영원히 필 수 없다는 사실도 부정할 수 없다. 모든 긍정의 말들에 부정을 붙이려면 얼마든지 붙일 수 있다. 그래서 내가 할 말은 하나다. 그냥, 숨만 쉬어라.

성장은 노력하지 않아도 어차피 일어날 일이다. 꽃이 피기 위해 애쓰지 않듯, 우리는 살다 보니 이미 자라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것도 안 되어도 괜찮고,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괜찮다. 무책임하게 들릴 수 있다는 것도 안다. 하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결과를 받아들이는 것 역시 결국 자신의 선택이다. 남이 대신 살아줄 인생은 없다. 내가 남을 책임져줄 수 없듯이, 아무리 화려한 말들로 날 위로해도 그 말을 내뱉은 그 누구도 나를 책임져주지 못한다.

본디 책임이라는 것은 무거운 게 당연하다. 우리가 맡은 책임 중 가장 무거운 것은 자기 자신이다. 그래서 자꾸만 인생을 남에게 맡기고 싶어진다. 하지만 내 삶을 내가 책임질 수 있다는 사실은 생각보다 좋은 일이다. 되고 있는 나도, 되고 싶은 나도, 언제든 될 수 있으니까.


삶은 생각보다 단순하다. 복잡하게 느껴진다면 그것은 우리가 그렇게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먼 미래를 붙잡고 살 필요는 없다. 당장 눈앞에 놓인 선택지 중 하나를 고르면 된다. 돈이 필요하면 지금의 현실에서 가능한 방법을 찾고, 하고 싶은 게 있다면 그것을 위한 선택지를 고민하면 된다. 잘하는 것이 있다면 어떻게 써볼 수 있을지를 생각하면 된다.

돈과 명예과 불안을 지워줄 거라는 기대는 버려야 한다. 지금 불안하다면 성공 이후의 불안은 더 커질 뿐이다. 행복이 있는 한, 불안 또한 사라지는 감정이 아니라 평생 함께 가는 동반자나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차라리 마음 편히 하고 싶은 걸 하고 살라는 것이다. 그게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라 해도.


살다 보면 내가 뱉지 않은 말들이 발목에 족쇄가 되어 외로움을 배울 기회를 앗아 가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는 남을 기준으로 한 행복만을 배워왔다. 모두가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 채, 서로의 그림자만을 좇고 있다. 그래서 외롭고, 그래서 그립다. 시간이 쌓일수록 더 맑았던 나 자신을 자꾸만 회상하게 된다.

하지만 중요한 건, 많이 변한 것 같아도 뿌리는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단지 가지가 더 멀리, 더 무겁게 자라났기에 그 길이만큼의 외로움을 혼자서 감당하게 되었을 뿐이다. 외로움이 깊어지고, 그리워할 무언가가 생겨났다는 건 그만큼의 가지를 감당할 수 있을 만큼 자라났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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