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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엄진 Sep 25. 2016

프랑스, 혁명의 역사

  프랑스에 도착한 날은 7월 14일. 프랑스의 혁명기념일이었다. 1년 중 가장 성대하게 기념하는 국경일이라기에 일부러 입국 날을 맞추었다. 에펠탑 주변으로 성대한 불꽃축제가 열리고 에펠탑도 프랑스를 상징하는 빨강, 파랑, 흰색으로 변신한다고 한다. 이 모든 정취를 느끼려고 일부러 14일에 입국을 했건만.. 결론적으로 너무 피곤했던 나는 아무것도 보지 못한 채 깊은 잠에 빠져버리고 말았다. 잠결에 폭탄이 터지는 듯 웅장한 불꽃 터지는 소리를 들었을 뿐....

  화려한 장관은 놓쳤지만 다음 날 버스를 타고 파리 시내를 누비다 샹젤리제 거리에 내걸린 삼색기를 발견했다. 그렇게나마 프랑스혁명의 기운을 느낄 수 있기를 바랐다. 예술가와 낭만, 에펠탑, 철학, 맛있는 빵과 디저트. 프랑스 하면 떠오르는 것은 너무 많지만 “혁명”이라는 두 글자는 늘 프랑스에 대한 호기심과 관심을 갖게 하는 단어였다. 왠지 프랑스 사람들은 부당한 것이라면 그 어떤 것도 참지 않고 덤벼 자신들이 원하는 세상을 만들어갈 것 같은 환상이 있었다. 사회에 불만은 많지만 그럴수록 무기력해져만 가는 ‘헬조선'의 '흙수저’ 담론을 접할 때마다 그런 프랑스인들이 부러웠다.

샹젤리제거리의 삼색기

  7월 14일이 기념하는 것은 프랑스의 수많은 혁명 중에서도 대혁명이라고 불리며 전 세계에 영향을 준 혁명 중의 혁명이라고 할 수 있다. 1789년, 그러니까 내가 태어나기 딱 200년 전 있었던 프랑스 대혁명은 전 세계 적으로 지금과 같은 민주주의, 공화정 사회의 시초를 깨운 혁명이었다. 왕과 귀족이 모든 특권을 독점하고 90퍼센트가 넘는 피지배계층을 착취하던 관행을 깨고자 했던 최초의 시도였다. 세계사의 수많은 혁명 가운데서도 프랑스혁명이 시민 혁명의 전형으로 여겨지는 것은 그것이 그만큼 인류의 세계관을 획기적으로 바꿔놓은 의미를 갖기 때문일 것이다.  

  비록 피곤에 절어 불꽃축제는 놓쳤다 해도 프랑스인들의 역사가 살아 숨 쉬는 파리를 거닐며 세상을 바꾸기 위해 과감히 도전하고 연대했던 그들의 정신만큼은 오래 마음에 간직하고 싶었다. 혁명의 도시답게 2000년 이후 매년 평균 1500건의 시위가 벌어질 만큼 다양한 이슈에 자신의 의견을 표출하는 확고한 전통이 자리 잡았다고 한다. 파리지앵에겐 특별한 반항정신이나 유전자라도 있는 것일까? 대부분 시위는 합법적이고 평화적으로 진행되지만 국제뉴스에서는 프랑스 시민들의 격한 감정표현도 심심치 않게 발견된다. 

  궁금한 마음에 프랑스혁명의 역사를 되짚어보았다. 그렇게 꼼꼼히 이들의 지난 시간을 돌이켜보니 프랑스 시민들의 저항은 특별한 DNA도, 독특한 성질도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것은 아주 오랜 시간에 걸쳐 만들어온 이들의 문화이자 노력의 결실이었다. 1789년 대대적인 혁명이 일어났지만 그것은 혁명의 끝이 아니라 시작에 가까웠다. 혁명 이후 80여 년이 넘는 시간 동안 프랑스는 그 어느 때보다도 격동의 시기를 보내야 했다. 혁명으로 선거를 치르고 나면 이어지는 쿠데타와 제정 선언으로 또다시 황제가 집권하는 제정, 왕이 집권하는 왕정이 스멀스멀 등장했고, 그럴 때면 또다시 힘을 합쳐 봉기를 일으키는 혁명의 반복이었다. 1830년 7월 혁명, 1832년 6월 봉기, 1848년 2월 혁명이 모두 그랬다. 4대 뮤지컬 중 하나인 레미제라블의 원작 소설인 빅토르 위고의 장발장의 배경이 된 것이 바로 7월 혁명과 2월 혁명 사이에 있었던 미완의 혁명 6월 봉기다. 그렇게 프랑스 시민들은 모든 시민들이 국가의 진정한 주인이 되기까지 이를 저해하려는 수많은 움직임을 거듭 막아내 온 역사를 몸소 체득하고 있는 것이다.

영화 레미제라블의 한장면 

  프랑스 대혁명 이후에도 파리에는 세계사적으로 중요한 굵직굵직한 혁명들이 이어졌다.  먼저 1871년에는 두 달간의 짧은 사회주의 자치정부의 움직임이 있었다. 이름하여 파리코뮌. 나폴레옹 3세의 제정이 끝날 무렵 전쟁에서 패하고 무능한 정부에 반발하며 노동자와 민중이 세운 세계 최초의 사회주의 자치정부이다. 그러나 70여 일간의 자치 끝에 단 일주일간의 정부군의 진압으로 3만 명에 가까운 시민이 죽고 수많은 사람들이 처형당하며 코뮌은 붕괴하고 만다. 프랑스 가열찬 혁명의 역사 중 안타까운 비극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세계사에서 처음으로 야간노동 철폐 10시간 노동 등 사회주의 정책을 실행에 옮기고자 하며 이후 사회주의와 공산주의 운동에 큰 영향을 주었던 사건이었다.  

  파리 코뮌 이후에 제 3 공화국이 시작된 프랑스는 2차 대전이 발발하기 전까지 비교적 안정적인 공화정 체제를 유지했으나 2차 대전의 발발로 독일의 지배하게 들게 된다. 이 당시 파시즘 정권과 비시정권에 반대하는 레지스탕스 운동이 역시 프랑스를 중심으로 일어나게 된다.     

  불의와 부당함에 맞서게 될 때마다 더 나은 인간과 사회를 꿈꾸는 프랑스인들의 도전은 현대에 들어서 1968년 있었던 68혁명으로 이어진다. 앞선 혁명들과 달리 68혁명은 ‘배부른 혁명’이라는 소리를 들어야 했다. 무능한 정부나 기근, 전쟁에 대항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학생과 여성, 노동자들이 또다시 바리케이드를 쌓아 올려가며 외친 것은 단지 물질이 아니었다. 이들은 기성세대의 암기 위주의 주입식 교수법, 학벌과 인종, 성, 직업에 의한 차별, 인간의 존엄에 대한 고민이 사라진 채 자행되는 모든 방식의 억압과 착취에 반대했다. 무엇을 얻어 내기 위함이 아니라 모든 것을 자유롭게 주장하기 위해 외친 ‘몽상가’들의 헛소리 같은 혁명이었다. 

  68혁명의 결과 아무것도 변한 것 같지 않았지만 모든 것이 변해있었다. 68혁명의 외침은 뉴욕, 도쿄, 베를린 세계 곳곳으로,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문화와 인식 속에 퍼져갔다. 사람들은 권위주의 타파를 외치며 서로를 너라고 부르며 격식을 타파했다. 젊은 여성들은 스타킹과 하이힐을 던져버렸다. 누군가에게 68년 5월은 무질서와 파괴의 끔찍한 악몽이었고, 누군가에겐 고루한 사회관습을 바꾼 문화혁명의 분수령으로 기억될 것이다. 

68혁명 당시 거리로 나온 프랑스의 대학생들

  대혁명에서 68혁명에 이르기까지. 프랑스인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세상을 위해 끊임없이 싸우고 도전했다. 물론 그 과정에는 그들이 원하는 세상이 무엇인지에 대한 깊이 있는 사상적 고민이 전제되었다. 혁명이 있기까지 그 어떤 혁명보다도 열띤 대화와 토론, 다양한 사유에 대한 존중이 함께했다. 그렇다고 그 과정이 아름다웠던 것만은 아니다. 폭력이 난무했고, 피가 흘러 상흔이 남기도 했다. 하지만 프랑스인들은 여전히 함께 연대해 쟁취해낸 투쟁의 역사를 가장 자랑스럽고 성대하게 기념하고, 기억하고 있다. 

  프랑스가 유토피아인 것은 아니다. 모든 발언의 자유가 보장되는 만큼 시끄럽고, 잡음이 많다. 우리의 관점에서 보면 더욱 비상식적이고 극단적인 생각들도 공론화되어 상당한 지지를 받기도 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에너지가 부럽다. 깊은 사유와 끊임없는 대화와 토론, 그리고 합의된 가치를 향해 저항하고 실천에 옮기는 혁명이 톱니바퀴처럼 맞물리며 만들어내는 선순환, 그것이 마치 그들 고유의 유전자에 새겨지기라도 한 듯이 문화로 자리 잡게 만든 그들의 역사가 부럽다. 

  짧지만 우리에게도 자랑스러운 시간들이 있다. 물론 그것을 어떻게 기억하고, 어떻게 가르칠 것인지에 대한 논란이 계속되고 있긴 하지만 말이다. 오늘의 대한민국을 살아가는 우리는 어떤 가치들을 지키며 나아가야 할지  샹젤리제 거리에 펄럭이는 삼색기를 바라보며 잠시 생각에 잠기었다. 우리에게도 파리 시민들과 같은 에너지와 성숙한 시민의식이 가능할 것이라 믿는다. 무력한 회의주의자가 되고 싶을 때마다 68혁명의 몽상가들이 했던 한마디를 떠올리고 싶다. “모든 것은 가능하다. 다만 당신이 꿈꾸지 않았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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