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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엄진 Sep 25. 2016

베네치아, 물의 도시

  늦은 밤이 되어서야 베네치아에 도착했다. 파리와는 확연히 다른 습기와 더위가 나를 반겼다. 터미널에서 나와 숙소를 찾기 위해 몇 발짝 옮기자마자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깜짝 놀랐다. 전 세계 도시들이 점차 비슷비슷한 모습으로 바뀌어가는 탓에 어딜 가도 생경함을 느끼기가 쉽지 않다. 물의 도시라고 하는 베네치아는 달랐다. 바다 가운데 건물이 있고 다리가 있고, 땅이 아니라 물이 먼저 보이는 곳이라니. 검은 바다에 잔잔히 비친 불빛이 만들어낸 조화가 너무 아름다운 곳이었다. 어릴 적 만화책에서 보았던 베니스의 상인의 배경이 3D로 튀어나온 것 같기도 하고 놀이공원에서 꼭 타던 신밧드의 모험의 실사 같기도 했다. 베네치아는 수상도시인만큼 주변에 위치한 작은 섬들이 주요 관광지고 이동을 위해서는 택시도 버스도 모두 뱃길에서 움직이는 ‘수상’ 교통기관을 이용해야 한다. 베네치아에 머무는 이틀 동안 첫날은 아이유 뮤직비디오 촬영지로도 유명한 무라노, 부라노 섬을 가고, 다음날 베니스영화제가 열리는 리도섬에 가는 것으로 계획을 세웠다. 

해질녘의 베네치아

  첫날 무라노, 부라노 섬보다 기억에 남는 것은 한 청년이었다. 나는 일찍이 동선을 확인하고 수상버스를 타기 위해 정류장으로 향했다. 출발까지 20분 정도 남은 것을 확인하고 간단한 물과 간식을 사기 위해 코 앞에 있는 마트에 들렀다. 내가 계산할 것은 물과 작은 빵 하나인데 한가득 장을 본 한 이탈리아인이 내 앞에 있었다. ‘아직 여유 있으니까~’ 쌓인 물품이 많긴 했지만 이 정도면 버스시간에 맞춰갈 수 있겠다 생각하며 약간 초초한 마음으로 기다기로 했다. 그런데 갑자기 이 앞사람이 계산대 직원과 뭐라 뭐라 이야기를 하더니 다시 마트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가져온 연어에 바코드가 붙어있지 않았던 것이다. 그 큰 마트에 바코드 붙은 연어를 가지러 간 이탈리아 남성은 한참을 기다려도 오지 않았다. 어느덧 시간은 훌쩍 지나고 버스시간이 얼마 안 남아서 그러니 내 것을 먼저 해줄 수 있냐고 물어봤다. 하지만 불친절한 인상의 이탈리아 마트 직원은 단호하게 안 된다고 거절했다. ‘한국 같았으면 해줬을 텐데....’ 나는 어쩔 수 없이 물과 빵을 계산대에 놓고 버스를 타러 나왔다. 물과 빵을 포기하고 나왔는데 버스는 이미 사람이 만원이었다. 아침부터 되는 일이 없다는 생각에 더운 날씨에 짜증이 확 났다. 버스에 타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에 속수무책으로 멍 때리고 있는데 갑자기 누가 나를 툭! 치는 것이었다.

  ‘누구지?' 돌아보니 마트에서 내 바로 뒤에 줄 서 있던 곱슬머리 청년이었다. 그의 손에는 내가 두고 간 물과 빵이 들려있었다. "헤이! 버스 안 늦었어요? 얼른 이거 갖고 타요! Have a nice day!" “어머나! 하우머치? 땡큐 땡큐” 난 너무 고맙고 놀라서, 몇 유로라도 사례하려 했지만 그는 돈은 됐다며 절레절레 손사래를 치고 다시 마트로 뛰어 들어갔다. 세상에 이런 마음 따뜻한 청년이 있나! 나는 결국 그 버스를 타지 못했지만 그가 가져다준 물과 빵을 물끄러미 바라보니 다음 버스를 기다리는 시간도 감사하게만 느껴졌다. 

  아무 이유 없이, 어떤 대가도 바라지 않고 호의를 베풀어준 이탈리아 청년! 그는 내게 베네치아, 아니 이탈리아라는 나라 자체를 따뜻하고 감동적인 곳으로 만들어줬다. 그렇게 시작된 하루였기에 무라노, 부라노 섬의 아름다움이 더욱 기분 좋게 와 닿았다. 그리고 나도 누군가에게 그런 사람이 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여행을 하다 보면 미숙한 관광객이라 신경을 곤두세워야 할 때가 많다. 순진하게 있다가는 괜한 손해를 보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긴장하고 다니던 여행 중에 이름 모를 청년의 따뜻한 마음은 정말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보게 했다. 무라노, 부라노 섬의 유리공예, 경치도 아름다웠지만 왠지 그의 마음이 더욱 오래 기억에 남을 것 같다. 사람이 사람을 얼마나 행복하게 할 수 있는지 새삼 느끼게 된 날이었다. “그라찌에!” 

예쁜 색색깔의 집-부라노
무라노 섬의 유리공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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