힌두 나라의 이슬람 유적지
델리로 내려오니 한결 따뜻하다. 짐을 줄이기 위해 한국에서 가져온 오리털 패딩 코트와 수건을 버려버렸다. 델리는 뉴델리와 올드델리로 나뉘어있다. 올드델리는 200여 년간 인도 대륙을 호령했던 무굴제국의 옛 수도이고, 뉴델리는 1911년 영국에 의해 조성된 계획도시다. 델리는 인도의 수도이기는 하지만 여행자들 사이에서 인기 있는 관광지는 아니다. 인도에는 사막, 바닷가뿐 아니라 이국적이고 아름다운 도시들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오히려 수도인 델리는 스쳐 지나가는 도시가 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여전히 델리는 인도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꿰뚫어 볼 수 있는 멋진 장소이다.
작은 올드델리 안에는 과거 무굴제국의 영광과 흥망성쇠, 영국의 식민지배와 독립을 향한 인도인들의 투쟁을 만날 수 있는 현장들이 모여 있다. 하루 만에 지하철로 몇 정거장이면 몇 백 년의 시간여행을 한 듯 오묘한 기분을 느낄 수 있는 것이다. 먼저 1600년대 무굴의 전성기로 떠나기 위해 무굴의 도성이었던 붉은 성(Red Fort)과 인도에서 가장 큰 모스크인 자미 마스지드(Jami Masjid)로 향했다.
멋모른 채 과거 인도의 유적지라고만 생각하고 이 무굴제국의 유적을 돌아보면 다소 의아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힌두교의 나라인 인도를 온통 이슬람 문화가 덮고 있기 때문이다. 인도의 가장 대표적인 유적들이 모두 이슬람 형식이라 마치 중동 아랍국가에 온 것 같은 느낌마저 든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무굴제국’ 자체가 12세기 이후 이슬람의 인도 침입으로 만들어진 ‘이슬람 왕국’이기 때문이다. 1526년부터 1858년까지, 그러니까 16에서 19세기까지 인도는 사실상 이슬람 세력에 의해 건설된 왕국의 지배를 받았다. 그렇기 때문에 북인도의 무굴제국의 유적에 이슬람의 향기가 짙은 것은 당연한 것이다. 우리나라도 고려와 조선을 지나며 불교와 유교로 지배적인 종교가 바뀌었듯 인도 역시 시대에 따라 종교도, 문화도 달라졌던 것이다.
실제로 인도 인구의 대부분(약 2/3)이 힌두교이지만 이 당시의 영향으로 상당수의 인도인들이 이슬람교 신자이며, 특히 이 올드델리 지역에는 이슬람 신자들이 많이 살고 있다. 올드델리에서 무굴제국의 유적을 둘러보는 것은 인도가 식민지배를 받기 직전, 이슬람 세력에 의해 인도 전역과 아프가니스탄까지 아울렀던 샤자한과 그의 아들 아우랑제브에 의해 건설된 그 당시의 전성기를 엿볼 수 있는 시간이다.
붉은 성은 인도 현지 인들에게 랄 낄라라고 불린다. 랄은 붉다, 낄라는 성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이름처럼 성은 온통 붉은색이다. 웅장하면서도 위엄 있는 성의 모습에서 과거 무굴제국의 영광을 엿볼 수 있다. 화려하고 아름답다기보다는 마치 전투 요새처럼 보이는 이 성은 실제로 왕궁 역할뿐 아니라 전투 목적도 겸하고 있었다고 한다. 무굴의 황제이자 건축광이었던 샤자한이 1639년~48년에 걸쳐 지은 성이고, 지금의 올드델리(샤자하나바드)가 수도였던 시절에 왕궁으로 사용했던 건물이다. 그러나 사실상 샤자한은 이곳에서 그리 오래 머물지 못했다고 한다. 타지마할, 아그라 성등을 건축하느라 국가의 재정을 펑펑 쓰던 아버지를 못마땅하게 생각했던 아들 아우랑제브가 반란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이후 방문한 이슬람 사원 자미 마스지드 역시 샤자한의 작품이다. 샤자한이 죽고 난 뒤인 1656년에 완공되어 그는 이 사원의 완성 모습을 보지 못했다고 한다. 이 사원은 수용인원만 2만 5천 명으로 인도의 이슬람 사원 중에 규모가 가장 크다. 인도하면 힌두교가 떠오르지만 실제로 인도 내에는 상당히 다양한 종교를 가진 사람들이 어우러져 살고 있다. 그만큼 갈등이 많은 곳이기도 하다. 실제로 사원 주변에는 힌디가 아닌 아랍어로 쓰인 구절이 많이 보이고 분위기도 확연히 다르다. 한편, 자미 마스지드는 과거 인도의 독립을 위해 힌두교, 이슬람교를 막론하고 수많은 인도 사람들이 모였던 곳이기도 하다.
사원 내부로 들어가면 널따란 광장과 높이 36미터의 거대한 모스크, 흰 대리석 돔이 이슬람 특유의 온화하면서 은은한 느낌으로 신성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하지만 무엇보다 압권은 미나렛이라 불리는 두 개의 뾰족탑에서 내려다보는 올드델리의 시내 풍경이다. 계단을 하나하나 올라가는 과정은 지난하지만 꼭대기에서 바깥을 내다보면 한눈에 인도가 들어온다. 눈으로 보면서도 이해할 수 없는, 이전에 본 적이 없는 세상이었다. 엄청난 유적과 엄청난 사람들, 엄청난 혼잡함. 과거의 위엄을 보여주는 위대한 유적이 무색하게 그 주변에는 치열한 삶의 전장이 펼쳐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