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식의 숨겨진 효능
배추에 대하살을 갈아 넣고, 새우젓을 비롯한 각종 양념들을 버무린다. 그리고는 약간의 물을 넣고 자작하게 끓여내면 게국지가 완성된다. 꽃게나 박하지 따위를 몇마리 넣어도 좋다. 젓갈이 끓으면서 쿰쿰한 냄새가 진동한다. 맛은 흡사 태국의 어느 요리와 비슷하다. 처음 먹어보는 사람이라면 당황할 수도 있다.
나는 어렸을 때 음식에 대한 의심이 많았다. 처음 보는 생선이나 젓갈, 낯선 과일이나 야채도 경계하였다. 어머니께서 젓갈 반찬을 집어서 밥 공기에 올려놓으면, 젓가락으로 들어서 요리조리 살펴보고, 냄새도 한 번 맡아본다. 괜찮다 싶으면 마침내 입에 넣어서 씹어보지만, 식감이 물컹하거나 삭힌 냄새가 나면 이내 뱉어냈다. 내가 고향 특산품인 어리굴젓이나 꼴뚜기젓을 먹지 않았던 이유이기도 하다. 게국지를 먹기 시작한 것도 어른이 된 이후이다.
얼마 전에 김장을 위해 서산에 다녀왔다. 우리 큰 조카는 이제 열살 남짓되었다. 조카에게 게국지를 조금 찢어 주었는데, 젓가락으로 들더니 요리조리 살펴보고, 냄새를 맡더니 입에 넣지 않았다. 할머니가 배를 깎아주었을 때에도 그랬다. 유전자란 이렇게도 무섭다. 인류는 모계유전이기 때문에 외삼촌과 조카가 유전적으로 가장 가깝다고 하던데, 우리 조카도 나처럼 음식에 대한 의심이 많은가 보다.
사람들에게는 제각기 다른 걱정거리가 하나씩 꼭 있다고 한다. 겉으로 보기에는 모든 일이 잘 풀리는 것 같은 사람에게도 말 못할 고민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나에게는 별다른 걱정거리가 없다. 어머니는 건강하시고, 사무실은 조금씩 성장하고 있으며, 아내와의 사이는 더 바랄 것 없이 좋다. 피우다 끊다 반복하던 담배도 더 이상 찾지 않고 있다. 오랫동안 즐겨온 테니스도 다시 시작했다. 골프를 좋아하시는 장인어른을 모시고 서산에 있는 골프장에 한 번 다녀오겠다는 계획도 있으므로, 최근에는 골프를 시작해서 재미를 붙이고 있다. 주말마다 서울대학교에 가서 고생을 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 시간도 좋다.
아버지께서 돌아가신지 반년이 되었다. 어머니께는 "아버지께서 하늘에서 보고 계시니, 남은 가족들끼리 하루하루 행복하게 살아야"한다고 말씀드리고 있다. 그러나 나 역시 때로는 그러한 모든 것이 의미가 없다고 느껴지기도 한다. 나는 이따금 찾아오는 멍한 상태가 어디서 비롯되는지 살펴보지만, 시간이 흐르기를 기다리는 것 외에는 별다른 출구가 없다는 사실을 느끼게 될 뿐이다. 그마저도 가끔은 망각 그 자체가 그다지 반갑지 않다.
이번에 담근 게국지는 유독 새우젓 향이 입에 길게 머무는 느낌이다. 잊혀진 기억을 떠올리고 싶을 때 음식은 꽤 적절한 도구가 된다. 그 기분을 언어로 써놓으면, 미각과 감정을 공유할 수 있다.
나에게 나와 같은 아들이 생긴다면, 나는 아들에게 게국지를 끓여줄 것이다. 게국지를 담그는 것이야 어머니께서 해주실테고, 나는 물을 넣고 자작하게 끓여주기만 한다. 내 아들도 게국지를 들고 이리저리 살펴보며 낯설어할지도 모르겠다. 언젠가 지 아비가 여기저기 남겨놓은 쓸모없는 기록을 발견하고, 관념으로만 남아있을 할아버지에 대하여 생각해볼 수 있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