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오브 인터레스트>
<존 오브 인터레스트>를 특징짓는 이미지와 사운드의 불일치는 지나치게 많이 언급되었기에 재론할 필요성이 있는지 의문이 든다. 알랭 레네가 <밤과 안개>에서 내레이션과 홀로코스트의 사진들, 그리고 현재의 아우슈비츠를 촬영한 영상을 통해 역사에 대한 재고를 요청하던 것과 달리, <존 오브 인터레스트>는 정제된 이미지와 과잉된 음향의 불협화음에 기반한 새로운 접근 방식을 취하고 있다는 것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일 터이다. 회스 일가의 생활상과 일화에 초점을 맞춘 단순명료한 서사, 풀샷이 대부분을 이룸으로써 인물들을 관조하는 카메라, 그리고 <존 오브 인터레스트> 특유의 괴괴한 내적 질서를 철저히 무시한 채 영화 전체를 횡단하는 비명과 총성. 이 모든 것들이 일조하여 관객에게 총체적인 덩어리의 헝태로 불편함을 전이시킴으로써 아우슈비츠의 참상을 감각하게 한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들이 과연 <존 오브 인터레스트>에서 우리가 사운드에 치중한 탓에 역설적으로 이미지의 기능을 방기하는 건 아닐지 의심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영화 속 사운드의 위상은 너무나도 명백하니까.
그럼에도 <존 오브 인터레스트> 속 사운드의 속성은 분명히 할 필요가 있을 테다. 영화 내적으로 사운드가 다루어지는 방식이 생경한 탓에 회스 일가의 저택과 아우슈비츠가 지근거리에 위치한다는 점에도 불구하고 이미지의 틈바구니 사이로 새어드는 외부의 소리는 허구의 음향으로까지 느껴진다. 이는 회스 일가의 삼녀가 자아내는 울음소리와 대비되어 더욱 확고해지는데, ‘헤트비히’(산드라 휠러)의 방에서 ‘소피’(스테파니 페트로비츠)가 립스틱을 바르고 거울을 보며 드레스를 입은 자태를 뽐낼 때, 닫힌 방문이 울음소리를 반사시켜 아이의 방과 ‘헤트비히’의 방의 물리적 거리를 체감케 한다. 하지만 이와 상이하게 아우슈비츠의 소리는 청각적 원근법을 초월한 채 전혀 쇠퇴하지 않은 상태로 방 내부에 머무른다. 실제로 이 소리는 회스 일가의 저택에 국한한다면 그들이 집안의 어떤 지점에 위치하는지와는 무관하게 공간을 지배하며 음향이 가진 물리법칙에서 벗어난다. 소리가 거리에 비례하여 증폭되는 유일한 장면은 ‘루돌프’(크리스티안 프리델)가 아우슈비츠 내에서 포로들의 참상을 목격할 때뿐이기에 저택에 도달하는 소리의 출처가 담 너머의 수용소라고 짐작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러한 개연성에 의존하기에는 카메라가 그의 얼굴만을 응시하며 주변 양상을 의도적으로 은폐하기 때문에 실재하는 소리라는 증거라고 확언하기에는 어려움이 발생한다.
부재는 곧 존재를 증명한다. 그래서 우리는 사운드가 부재하는 두 공간에 대해 고찰해야만 한다. 회스 일가가 자주 방문하는 강변과 ‘루돌프’의 출장지가 바로 그것인데, 소리는 일가족이 저택에서 나와 야영을 할 때와 ‘루돌프’가 아우슈비츠를 떠난 시점에는 자취를 감춘다. 여기서 중요한 건 바로 별개의 두 사건 모두 사운드가 배제된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이내 비명과 총성이 깃든 저택으로 되돌아간다는 점이다. ‘루돌프’는 아이들과 물놀이를 하던 중 부유하는 수용자의 유해를 발견하고 강에서 뛰쳐나와 집으로 복귀한다. 후자의 경우, <존 오브 인터레스트>의 시나리오를 이끌어가는 플롯이기도 한데 영화는 ‘루돌프’가 전근을 갔다가 집으로 다시 회귀하는 과정만이 유일한 중심 사건이다. 이들이 집안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곧 소리로의, 아우슈비츠의 징후로의 귀소를 의미한다. 공간 내에 상존하던 소리가 내재한 참상에로의 재귀. 이렇게 해석하면 어떻게든 저택을 떠나지 않으려는 ‘헤트비히’와 전근이 취소되자 쾌재를 부르는 ‘루돌프’의 행태는 소리와 본인들이 체화한 파괴를 향한 갈망이 된다. 소리는 아우슈비츠에 머무르기 위한 등장인물들의 심리가 반영된 비디제시스적 사운드라고도 독해할 수 있는 것이다. 즉 <존 오브 인터레스트>의 소리는 관객에게 아우슈비츠의 존재를 주지하는 데에 그칠 뿐만이 아니라 홀로코스트가 대표하는 인간 기저에 놓인 합리적 파괴성 그 자체에 대한 알레고리가 된다.
<존 오브 인터레스트> 속 카메라는 풀샷을 촬영할 때 삼분할 선의 세로축 가운데에 인물을 놓아 하늘과 지상, 인물의 비례를 균등하게 유지한다. 이외에도 정원의 분수를 기준으로 공간을 양분하여 ‘루돌프’가 담을 바라보는 장면과 같이 가로축의 정중앙에 인물을 위치시키는 구도가 자주 등장하기도 한다. 또한 인물의 동선 역시도 카메라의 중심을 향하는데, 이것이 가장 잘 드러나는 부분은 파티장에서의 ‘루돌프’의 모습이다. 카메라는 인물의 동선은 아랑곳하지 않은 채 놓이게 되어 여러 각도로 파티장 곳곳을 촬영하며 컷들이 순차적으로 진행된다. 하지만 ‘루돌프’는 화면의 중간에 가닿기 위해 걸음을 옮기거나 인파를 헤쳐 나아가며 심지어 이동을 중단해서라도 스크린의 가운데에 위치하려 한다. 그러고는 마침내 발코니의 중앙에 도착하고 샷의 중심부를 점유한다. 이후 댄스홀의 부감이 ‘루돌프’의 심리적 우위를 암시하며 음향은 서서히 페이드아웃 되고 ‘헤트비히’와의 통화와 함께 유폐됐던 아우슈비츠의 소리가 보이스오버로 깔린다. ‘루돌프’는 말한다. “파티장에 가스를 채우려면 얼마나 걸릴까.” 잔혹하도록 효율적인 발상. 어찌 보면 ‘루돌프’는 아도르노가 <계몽의 변증법>에서 지적한 이성적 사고와 합리적 방법, 그리고 이에 기반한 파괴적 양상을 대변하는 인물이다. 기실 ‘루돌프’가 보인 효율에 대한 집착은 작중 초반부터 대두되었는데, 그는 기술자들과의 회의에서 얼마나 많이, 빠르게 가스실을 순환시킬지에 대해 고민한다. ‘루돌프’가 가정적인 아버지로 묘사됨에도 나치의 간부라는 점과 극 중에서 드문드문 모습을 드러내는 횡포로 인해 관객은 그가 내면에 안은 이성중심적 사고와 그로부터 비롯되는 추악함을 쉽사리 파악할 수 있다.
서사가 암시하는 소리를 향한 귀소본능과 구도와 동선으로 획책한 중앙에로의 견지, 그리고 아폴론적 캐릭터의 전형인 ‘루돌프’. 이 세 요소의 교집합을 엮어내는 건 사실 그리 어렵지 않은데, 플라톤이 이성을 위해 문자를 박해하고 음성을 추대했듯, 혹은 데리다가 로고스에서 비롯된 기존 철학을 음성중심주의라고 지적했듯 이전부터 소리와 중심부, 이성은 긴밀한 상관관계를 띠고 있음이 당연시되었다. 이렇게 보면 화면의 정중앙으로 침입하려는 인물들의 움직임과 소리를 지향하는 그들의 양상들 모두 나치가 행한 도구적 이성과 그것이 수반하는 부작용을 목표하는 몸부림으로 간주할 수 있을 테다. 이쯤에서 영화에서 몇 번이나 나타나는 불분명한 이미지들의 함의를 나름대로 정의할 필요가 있겠다. ‘루돌프’가 아이들에게 읽어주는 <헨젤과 그레텔>의 흑백 반전 화면. 아우슈비츠 속 ‘루돌프’와 정원에 심어진 꽃의 클로즈업 이후에 나타나는 원색의 타블로들. 관객은 이 난데없는 화면들을 목격하는 순간 2분가량의 오프닝이 계획한 청각에로의 편향으로부터 괴리된다. 영화 곳곳에 드러나는 시각적 최면들이 주는 자극이 너무도 강하기에 사운드를 근저에 놓고 진행되는 영화의 방향성으로부터 탈선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영화의 테마에 부합하지 않는 생소한 이미지의 나열은 역설적으로 이미지의 복권을 시도함에 다름 아니다. 우리는 여기서 한 가지를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한다. 영화에 조응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이 이미지들조차 실은 인물들이 회귀하고자 하는 음성과 이성의 타개를 위해 기여하고 있음을.
‘루돌프’는 어떠한 결말을 맞이하는가. 후반부에서 ‘루돌프’는 계단을 내려가다가 몇 번이고 구역질을 한다. 여기서 유의해야 할 것은 카메라를 통해 설계된 구도이다. 직부감으로 계단을 응시하는 카메라는 핸드레일을 가운데에 두어 프레임을 이등분한다. 이런 구도 하에서 계단을 오르내리는 ‘루돌프’는 절대로 화면의 중심에 위치할 수 없다. 기존의 중심부를 향하던 동선은 제한되며 그에게는 화면의 좌측과 우측, 즉 주변부만이 허용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토악질은 작중 내내 구심으로 향하던 그가 주변부로 밀려나면서 거세되는 관성의 반작용에 가깝다. 이후 박물관을 청소하는 노동자들의 화면이 그를 덮어씌운다. 이 돌발적인 이미지는 앞서 언급한 불분명한 이미지들과 유사한 기능을 한다. 편집기술을 통해 끼어드는 박물관의 영상은 부지불식간에 영화의 시간대를 현재로 옮겨 놓고서는 과거의 인물을 관객으로부터 배제한다. 여기에서 들리는 소리는 빗자루와 걸레가 과거의 흔적이 놓인 작금의 공간을 쓸어내며 정리하는 사운드 이외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는 역사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중차대한 것으로 오인되는 인간의 사건들을 원심으로 유도하며 전개되는 양태와 닮아 있다. 인간은 이 이행으로부터 절대로 벗어날 수 없으며 뒤안길을 향한 운명에 순응해야만 한다. 현재의 우리는 영화 내에서 공고해 보이는 나치의 운명이 어떻게 종식되는지를 이미 안다. 관객의 선지와는 달리 ‘루돌프’는 영화가 지정하는 시점에서 이러한 사실을 알아채지 못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에게 도래할 파멸마저 진실로부터 사라지지는 않는다. 그래서 박물관 씬이 끝난 직후 ‘루돌프’는 몇 번의 구역질 끝에 고개를 저으며 주위를 살피는 것이다. 마치 그에게 다가올 몰락의 징후를 감지하는 듯이.
요약하자면 조나단 글레이저 감독이 행한 영화적 실험은 중앙을 향하는 서사와 인물의 동선, 이성을 표상하는 사운드, 그리고 이를 무색하게 하는 전위적 이미지의 틈입과 이전과 다른 구도의 카메라를 통해 성공적으로 치러진다. 이러한 영화적 요소들이 긴밀하게 교직되어 도구적 이성에 대한 회의라는 합목적성을 공유하고 이를 영화적 주제로 구축하는 것이다. 어느덧 인류사의 역린이 되어버린 홀로코스트는 영화로 재해석되는 순간 주체성을 상실하게 된다. 영화에서는 카메라가 주도하는 질서와 몽타주를 통한 자의적 배열만이 전지적이며 이외의 것들은 부수적일 뿐이다. 마치 ‘루돌프’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그를 주변부에 가져다 놓는 카메라와 그 틈 사이로 모습을 드러내는, 나치의 종말을 자명하게 하는 박물관의 컷처럼. 인물과 사건을 시각화하여 스크린 위에 옮겨 놓는 행위는 실재의 힘을 상실케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스크린 속 이들은 그저 관객의 영화적 체험을 위한 대상이자 실제와 무관한 시뮬라크르에 불과하기에. <존 오브 인터레스트>에도 당연히 적용되는, 영화가 만들어내는 이미지의 힘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영화는 역사와 인간마저 기호에 지나지 않는 존재로 전락시키는 장이 아니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