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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umovia Sep 01. 2024

잉여가 소환하는 시간과 세계

<동동의 여름방학>


스토리는 간소하다. 방학을 맞이한 동동은 어머니의 병세가 위독해지자 여동생 팅팅과 함께 조부모가 있는 텅로로 가게 된다. 이들이 당도한 텅로에는 엄격한 성격의 의사 할아버지, 아이들을 사랑스럽게 맞이하는 할머니, 여자친구를 임신시켜 집에서 쫓겨난 채 강도단과 어울리는 사고뭉치 삼촌이 있다. 동동과 팅팅은 죽음의 위기에 놓인 어머니의 상태가 무색하게도 텅로라는 외부 공간에 쉽게 적응하며 시간을 보낸다. 동동은 칭쿠오를 비롯한 아이들과 어울려 다니며 아기자기한 사건들을 일으키고, 팅팅은 마을에서 미친 여자로 취급받는 한쯔를 흥미롭게 바라보며 내밀한 연대를 형성한다. 어머니의 회복과 함께 할아버지가 삼촌의 집을 방문하여 동동 일가가 화합함으로써 끝난다. 이게 <동동의 여름방학>이 가진 서사의 전부이다.



1시간 30분 남짓한 시간에 녹여낸 이 느슨한 서사는 영화 전반에 산포된 잉여들에 의해 중단된다. 기차 안에서 화장실을 둘러싼 팅팅의 실랑이. 동동이 조작하는 미니카. 장난감을 얻기 위한 아이들의 거북이 경주. 이외에도 서사와 유리된 인서트 샷 등의 여러 잉여적 순간들이 영화 곳곳에 놓인다. 외려 이 잉여들이 존재감을 과도하게 피력하고 있기에 그것이 중심 서사의 진행을 방해하는 걸 넘어 전복시킬 정도로, 즉 잉여가 영화의 주를 이루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로 영화의 내적 세계는 잉여로 가득 차있다. 그렇다면 <동동의 여름방학>이라는 영화를 지배하는 이 잉여들의 존재 이유는 뭘까. 또한 카메라가 구축해 낸 시계 속에서 서사와 드라마를 구현하는 간편한 방법 대신 스크린에 잉여를 이식한, 이 영화의 비생산성이 내재한 목적의식은 무엇일까.



잉여들은 연출자 허우샤오셴에 의해 배치된 샷에서만 엿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영화의 또 다른 잉여에는 팅팅의 무표정이 있다. 팅팅은 동동과 아이들이 그들을 배척할 때에도, 기차선로에서 넘어져 죽음을 맞이할 뻔할 때에도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영화 내에서 발생하는 여러 시추에이션 속에서도 팅팅은 무표정으로 일관할 뿐 연기를 통해 감정이 전면에 놓이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마치 자신의 역할은 감정을 숨기는 것에 있다는 듯이. 이는 바쟁이 말했듯 아이들의 얼굴을 거울삼아 우리의 천진성이나 소박함을 되찾기 위함도 아니고, 얼굴을 통해 감정-이미지를 실체화하는 들뢰즈의 독법과도 무관하다. 왜냐하면 이 소녀의 얼굴에는 어떠한 감정도 부재하니까. 도리어 팅팅의 표정은 감정의 부재 그 자체만을 전달하기 위해 기능한다. 팅팅 역의 배우 이숙정의 무표정은 영화의 진행의 보탬이 되기는커녕 관객으로 하여금 의아함만을 불러일으키는 잉여적인 존재로서로만 작동하는 것이다.



이 잉여들을 단순히 영화 진행에 있어서의 장애물이라고 간주하며 영화의 가치를 폄하할 수도 있을 테다. 그러나 그것은 <동동의 여름방학>의 목적이 서사를 전달하는 것에 있을 경우에만 적용되는 얘기이다. 한 장면을 살펴보자. 동동이 팅팅과 함께 2층 마룻바닥을 뛰어다닌다. 쿵쿵대는 아이들의 발소리에 1층에서 진료를 보는 할아버지가 위를 쳐다본다. 카메라는 다시 2층의 남매를 비추고 층계의 공백에 할아버지가 등장하며 아이들이 겸연쩍게 멈춰 선다. 인물들은 아무것도 모른 채로 관객에게만 사건의 징후를 알리는 서스펜스적 방법의 전형이다. 또 다른 장면도 있다. 따돌림에 심술이 난 팅팅이 발가벗은 채 수영을 하는 동동과 아이들의 옷가지를 훔쳐 달아난다. 나체로 집에 도착한 동동은 할머니에게 혼나 벌을 서게 된다. 그리고 곧바로 그림놀이를 하며 태연자약한 팅팅의 모습이 배치된다. 영화의 편집이 동동의 난감한 상황을 팅팅, 그리고 관객과 함께 공모한다. 이 두 장면에서 말하고 싶은 건 불필요한 것처럼 보이는 잉여의 상황들이 영화의 문법을 고스란히 수행한다는 것에 있다. 잉여로 서사조차 주저케 하는 이 도발적인 영화가 도리어 잉여를 구현하는 데에 있어서만큼은 규칙을 철저히 준수하는 것이다. 영화적 방법론에 서사가 아니라 잉여가 더욱 합치하는 이러한 상황 속에서 잉여가 영화를 지배한다는 건 더 이상 착각이라고 할 수 없다. 필경 <동동의 여름방학>은 이 잉여를 관객에게 현시하기 위해 만들어진 영화이다.



그렇다면 왜 <동동의 여름방학>은 잉여를 전달해야만 했을까. 그것은 이 영화가 재현하고자 하는 것이 드라마가 아니기 때문이다. 영화의 소재인 '동동의 여름방학', 즉 여름이라는 계절은 의상, 색감, 미술 등의 여러 장치가 조화를 이룸으로써 획책된다. 그중에서 가장 큰 기여를 하는 방법이 바로 잉여들이다. 영화는 잉여들의 나열이라는 무분별한, 그러나 의도된 계획을 통해 서사 바깥에 놓인 여름이라는 시간의 총체를 스크린에 가져다 놓는다. 서사와 관계없는 잉여는 불필요한 시간의 무게를 가중함으로써 영화 속 시간을 규결하는 현상을 불러온다. 영화가 잉여들을 거듭함을 통해 내내 견지해 온 비생산의 의지는 역설적으로 '동동의 여름방학'을 오롯이 감각케 하는 시간 그 자체를 관객에게 전이시키는 것이다. 본질보다 아름다운 잉여라는 아이러니한, 그래서 더할 나위 없이 찬란한 본말전도.



영화가 호명하는 것은 시간만이 아니다. <동동의 여름방학>은 잉여의 배면에 놓인 죽음의 기운을 순간순간 드리운다. 선로에서 넘어지면서 화면에서 자취를 감추는 팅팅. 그런 팅팅이 발견한 아기새의 시체. 새의 애도를 도우려 나무에 오르던 한쯔의 추락. 그리고 어머니의 병마. 이 죽음의 징조들은 모두 팅팅과 관련한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병상에 누워 있는 한쯔의 옆에서 팅팅은 징후적으로 나타나던 죽음의 실체를 비로소 목도하게 된다. 그러자 시종일관 무표정이던 팅팅의 얼굴에 변화가 발생한다. 영화의 결말부가 다 되어서 그녀가 드디어 눈물을 보이는 것이다. 영화 내내 지속하던 무표정과 돌발적인 눈물에서 발생하는 낙차가 영화가 그려내는, 죽음 앞에서 무기력한 인간의 태도이다. 다행히도 영화에서는 모두가 죽지 않는다. 그럼에도 영화는 죽음의 징후를 마지막까지 스스럼없이 드러낸다. 난데없이 등장해서 공포를 자극하지만, 단지 치질 수술의 고통에 불과했던 삼촌의 비명처럼.


<동동의 여름방학> 속에서의 시간과 죽음, 이 절대적인 두 가치가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 영화에는 숙모의 임신과 한쯔의 유산이 있다. 또한 드문드문 내비치는 어머니의 병처럼 일련의 사건들 사이에 놓인 죽음의 그림자가 있다. 이 모든 것들은 잉여가 불러일으키는, 탄생과 죽음이라는 삶의 두 극점을 관장하는 시간과 함께 영화 속에서 대위를 이루며 구현된다. 생성하고 소멸하는 인간의 내부 원리와 그 외부에서 이들을 응시하는 시간을 규합하여 영화 속에 인간의 삶이라는,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보편적인 세계를 구축하는 것. 이것이 바로 영화가 잉여의 순간들과 팅팅의 무표정, 그리고 죽음을 절감하는 그녀의 눈물을 통해 우리 앞에 축조해 내보이고자 하는 것이다. 시나리오 작법서에 나열된 할리우드식의 규범이 전혀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그럼에도 숫제 영화의 산업화에 대한 비타협으로 치부할 수만은 없는 새로운 양식, 즉 잉여가 진실에 도달하는 순간이, 그리고 이를 통해 세계의 파편이 아닌 세계 그 자체가 되는 확장의 맹아가 이 영화에는 분명히 자리하고 있다.


P.S. ㅎㅎ여름방학 끝난 김에,,,근데 다시 보니 고칠 곳이 많네연. 귀찮으니까 고치지는 않겠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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