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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세스 박 Apr 04. 2021

금주 실패

술을 벗어날 수가 없어

애주가이기도 하고, 폭 음가 이기도 하고,


나는 술이 좋은데, 술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모르겠다.


한 번씩 간헐적 단식처럼 금주를 하고 싶은데, 마음처럼 쉽지가 않다.


주말 잘 지나가나 했는데, 오늘 남편이 제주 간 이후부터


남편이 먹다가 남기고 간 와인이 어찌나 신경이 쓰이던지


결국 남은 와인에 남은 맥주를 마셔버렸다.


아빠가, 내가 많이 닮은 아빠가 2주 전부터 우울증 약과 수면제를 복용하게 되었다.


술을 좋아하고, 매일 술에 젖어 있던(물론 본인은 아니라고 한다.)


술을 급하게 많이 먹고, 술자리에서 사람을 압도하고, 마지막에 계산까지 하면서


술자리의 진정한 주인공이자 멋쟁이었던 아빠가


술을 안 드시니


바람이 잔뜩 차 있다가 빠져버린 풍선 같다.


힘이 잔뜩 들어가 있었는데, 영락없이 어딘가에 볼품없이 앉아 있는 노인 같다.


아빠의 모습이 미래의 나의 모습인 것 같아서


미리 술을 마시지 않고, 본연의 내 모습으로 살고 싶어서 금주를 하려고 했는데


작심삼일이라고 했던가? 정말 조상님들은 대단하다.


삼일이 고비인 것을 어떻게 아셨을까?


나는 삼일을 겨우 넘기고 술을 마시고야 말았다.


그러고서 숨을 턱 내뱉고, 웃어버렸다.


나를 숨 막히게 한 것도 없었는데, 특별히 힘든 일도 없었는데, 나는 술 한 모금에 숨을 편히 쉬고, 마음이 편해지면서 웃게 되었다.


성인이 되면서, 나름의 시험들을 통과했지만,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자유가 주어지지는 않았다.


대학에 가는 것도 어려웠고, 취직을 하는 것도 어려웠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는 것도 어려웠다.


아이 둘을 낳고 워킹맘 생활을 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모든 어려운 것들 속에서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결혼 전이나 후나, 취직 전이나 후나


마트나 편의점에 가서 잘 진열되어 있는 술들을 고를 수 있는 것이라고나 할까?


원래도 술이 좋았지만, 그래서 더 좋기도 하다.


오늘은 너야. 돈이 없으니 너야. 비가 오니까 너야.


정말 다양한 이유들로 나의 변덕스러운 마음과 상황에 따라서 내가 유일하게 선택할 수 있었던 것이 술이었다.


돈 만원만 있으면, 이것저것 내 마음과 취향에 따라 고를 수가 있었다.


내가 선택한 것에 대해서는 어느 누구도 잘못되었어라고 말할 수 없었고, 혼자 취해서 울다 웃다 잠이 들어도 비난할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술이 좋았다.


외롭고 고독하고 무능력하고 나약한 나에게 유일하게 자유를 선사해 주고, 누릴 수 있도록 해주었으니까.


오늘 하루는 엄마의 어릴 적 살던 집 그림을 마무리했고, (비록 마지막에 사인펜 똥이 몇 군데 묻어서 멘붕이 왔지만) 남편과도 사이좋게 잘 지냈고, 그럭저럭 잘 보냈다.


내일 월요일 역시나 자신이 없지만, 세월의 빠름에 의지하며 또 일주일을 보낼 생각이다.


나이를 먹지 않았을 때는 다가올 내일이, 일주일이 두려웠지만, 나이가 어느 정도 먹은 후부터는 조금은 덜 두렵다.


이렇다 저렇다 할 새도 없이 시간은 너무 빨리 지나가 버리니까.


마흔이 넘어서 그런가 시간이 너무 빨리 간다. 


일요일 밤 출근이 너무 싫다가도 월요일 아침이 되면 어느새 수요일 목요일이 되어 있다.


그래서 회사를 다니기 싫을 때가 있어도 굳이 사표를 내야 할 이유를 모르겠다.


싫어도 빨리 지나가버리니까. 


회사를 그만둔다고 내가 할 일이 있는 것도 아니고, 더 행복할 것도 아니고, 더 누릴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더 근사할 것도 아니고,


술이 쓰다는. 술이 쓰다는 의미도 있지만, 술이 쓴다는 의미도 있다.


내 마음대로. 하고 싶다. 적어도 이곳에서 만큼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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