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벼운 글쓰기

버림의 미학

by 유나사

늘 가벼운 글쓰기를 추구해 왔습니다.
부끄럽지만 제 글은 그리 가볍지 못했기에 ‘추구했다’라고 말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 글은 조금씩이라도 무게를 덜어내 보려는 시도에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글에 가벼움이란 무엇일까, 먼저 생각해 봅니다.
읽는 이가 부담스럽지 않게 술술 읽어 내려갈 수 있다면 그게 가벼운 글이 아닐까요.
그럼 무거운 글은 무엇일까요. 주제가 명확히 닿지 않아 한두 번 문장을 되돌아보게 만드는 글이 무거운 글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저는 오늘도 그 아슬아슬한 경계 어딘가에서 글을 쓰고 있습니다.
그리고 어떻게 하면 제 마음에 이야기를 정확하게 전달할 수 있을까 고민합니다.

나름 가벼운 마음으로 시작했으니, 지금부터 ‘가벼운 글쓰기’에 대한 다소 무거운 이데올로기를 하나 꺼내볼까 합니다.


이데올로기.. 찾아보니 “인간, 자연, 사회를 바라보는 관점이나 신념 체계로, 현실을 설명하고 정당화하며 특정 집단의 가치관을 담은 이념적 의식의 형태”라고 쓰여 있네요.

두 분 정도 책장을 덮거나 뒤로 가기 버튼을 눌러 나가신 것 같네요.
나가지 마세요. 이제부터 재미있는 이야기 하겠습니다.

첫사랑 이야기부터 할까요?

제가 처음 ‘글’이라는 걸 썼던 기억은 중학교 무렵이었습니다. 철이 들기 시작하는 나이였던지, 한없이 보고 싶은 여자아이가 있었더랍니다. 아마도 첫 짝사랑이었겠지요. 첫 짝사랑이라고 표현하자니 부끄럽지만, 그 감정을 어떻게 표현할지 몰라 사랑이라는 단어를 씁니다. 하지만 풋풋한 좋아함 정도로 정리하는 것도 좋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좋아함이든, 아니면 다른 어떤 표현하기 어려운 감정이었든, 그 어린 마음이 제법 진심이었던지 일기를 쓰듯 그 아이에 대한 마음을 기록하곤 했습니다. 노트 한 권을 다 채울 정도로 열심이었던 그 기록은 결국 아무에게도 읽히지 못한 채 저만의 기억 속에 남아 있습니다.


여러분은 가만히 미소 짓게 만드는 학창 시절의 기억이 있는지요.

이제는 얼굴조차 흐릿하지만, 가끔은 그때 그 장소, 향기, 콩닥거리던 심장 고동의 기억까지 마음 깊숙한 곳에서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추억이 있지는 않나요? 지금의 저처럼 말입니다.


글의 흐름이 살짝 비틀어지기는 했지만, 이 글은 여전히 가벼운 글쓰기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다만 개인적인 이야기를 조금 기록해 봤습니다.


잠시 젖어들었던 첫사랑에 대한 기억은 잘 익은 커피 한 잔의 온기에 살짝 녹여 보내고, 다시 가벼운 글쓰기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그렇게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저는 그 아이보다, 어쩌면 글쓰기를 더 좋아하게 되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자기 사랑에 빠졌다고나 할까요. 아마도 남들에게 보여주지 못하는 글을 쓰고, 읽고, 또 고쳐 쓰다 보니 제 글에 애정이 깊어졌나 봅니다. 그렇게 저는 글쓰기에 점점 빠져들었습니다.


그 당시 유명한 시인이 있었습니다. 이름을 알려주면 제 나이대 분들은 알 수 있을 텐데, ‘원태연’이라는 시인이었습니다.


“손끝으로 원을 그려봐
네가 그릴 수 있는 한 크게
그걸 뺀 만큼 널 사랑해” – 원태연


저는 그걸 뺀 만큼 시와 시인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시인의 아류작 같은 시를 노트 한쪽 작은 공간에 담았다 지우기를 반복하며, 나이만큼 어린 시를 기록하고는 했습니다.


재미있던 기억도 있었습니다. 고등학교 시절, 선생님 한 분이 제 글을 교단에서 읽어주신 적이 있습니다. 부모님에 관한, 교내 백일장에 제출한 글이었습니다. 이름은 밝히지 않으셨는데, 저는 알 수 있었습니다. 누군가 내 글을 인정해 준다는 그 느낌, 그 전율은 아직도 잊히지 않습니다. 그날 이후 더 열심히 글을 썼던 기억이 있습니다.


다만 목적지가 없었습니다. 소설가나 수필가가 되겠다는 구체적인 목표가 없었기에 정식으로 교육을 받거나 투고할 생각도 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제 글은 지금도 정돈되지 않은 채 투박하기만 합니다. 글이 길어지면 지금처럼 무거워지기도 하고요.


그래서 이 글은 몸무게만큼 무거운 저의 글쓰기에 대한 ‘다이어트 계획서’이자, 어떻게 하면 조금 더 가볍게 글을 쓸 수 있을까 고민하는 ‘자기 성찰 보고서’에 가깝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제야 이 글의 본론에 근접해 가는 것 같습니다.


가볍게 여기까지 읽어 오셨다면, 이제부터 조금 무거운 이야기를 꺼내도 떠나지 않으실 거라 믿고
조금 진지하게 이야기를 펼쳐보겠습니다.


가끔은 벽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10대와 20대의 패기가 지나가고, 30대와 40대의 노련함도 기울기 시작하니 이제 근심과 걱정만 남은 것인지.
타인의 깔끔하고 가벼운 좋은 글을 보며 주눅 들고, 때로는 질투가 생기기도 합니다.


어릴 적에는 나도 충분히 좋은 글을 쓸 수 있다는 자신감으로 학습하듯 좋은 글들을 찾아 읽었습니다. 하지만 요즘은 좋은 글들을 보면 도대체 어찌 생긴 양반들이 이런 글을 쓰는 것인지 궁금하기만 합니다. 그리고는 살포시 베껴 써보기도 하고, 중간에 첨부하여 제 것인 양 으스대 보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복사된 문장은 결국 제 것이 되지 못합니다.


왜 그럴까 생각해 보니, 대부분은 저의 무거운 글쓰기 때문입니다.
그럼 저의 무거운 글쓰기의 원인을 알아보겠습니다.


요즘 들어 ‘버림의 미학’이라는 말을 자주 떠올립니다.
오래된 것을 버려야 비로소 새로운 것을 채울 수 있다는 의미겠지요. 저의 고질적인 문제는 그 ‘오래됨’을 좀체 버리지 못한다는 데 있습니다.

저는 단어 하나하나를 참 소중히 여깁니다.
주위 사람들을 이토록 소중히 대했다면, 아마 지금쯤 어디 시장님 자리 하나 꿰차고 앉아 있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니까요.

​단어에 애착이 깊다 보니, 마음에 드는 단어가 생기면 꼭 살려 쓰고 싶어 합니다. 퇴고하다 보면 어쩔 수 없이 버려야 할 때가 오는데, 그럴 때면 맞지 않는 퍼즐 조각을 억지로 끼워 맞추듯 문장을 돌리고 돌립니다. 그러면 결국 미사여구가 주렁주렁 달리게 되지요. 바로 ‘무거움’의 시작입니다.
(이 문장에서도 ‘미사여구’와 ‘주렁주렁’에 꽂혀 버렸네요. 히히)


​일단 이런 단점을 스스로 알고 있다는 점에 큰 점수를 주고 싶습니다. 힘들겠지만 언젠가 고쳐 써볼 거라는 희망도 가져보고요. 다만 오늘의 자아비판은 여기까지만 하려 합니다. 이쯤에서 멈추지 않으면, 덜어내려 시작한 이 글이 다시 감당 못 할 무게로 기록될지도 모르겠습니다.

​단어 하나 제대로 버리지 못하는 저를 보며, 일기장을 채우던 어린 시절의 소년을 떠올려 봅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쉽게 버리지 못하는 감정들을 가만히 보듬어 봅니다. 어느덧 식어버린 커피잔을 다시 한번 들어봅니다.
이제는 잔을 비워내듯 문장도 비워낼 수 있기를, 그래서 그 비어 있는 넉넉한 공간만큼 더 편안한 이야기가 찾아와 주길 기대해 봅니다.

​욕심껏 집어넣었던 단어 몇 개를 몰래 삭제하며, 다음번엔 조금 더 홀가분해진 문장과 가벼운 마음으로 돌아오겠습니다. 글을 쓰며 ‘덜어내는 즐거움’을 오롯이 느낄 수 있길 바라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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