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에 대한 단상

이름이라 쓰고, 기억이라 읽는다

by 유나사

오늘도 나는 책장을 뒤로 빠르게 넘긴다. 한참을 읽어 내려가던 책 속에서 기어코 확인해야 할 대목이 있기 때문이다.

​‘아, 이 사람 누구지? 이름이 뭐였더라? 처음 보는 이름 같은데….’

​정리되지 않은 기억의 구렁텅이를 헤매며, 맥락에 맞는 이름을 기어이 찾아내려 애쓴다.

그렇다. 나는 사람 이름을 잘 기억하지 못한다. 한때는 이것이 나만의 결함이라 여겼다.
하지만 주위를 조금만 둘러보니 이는 보편적인 사람들이 겪는 ‘장애 아닌 장애’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보편적’이라는 단어가 주는 안도감은 보편적인 사람들만이 안다. 나만 외톨이인 줄 알았는데, 이제는 혼자가 아니다. 나와 닮은 이들이 어디선가 함께 헤매고 있다는 뜻이니까.

이제 이 보편적인 사람들의, 결코 보편적일 수 없는 ‘모자람’에 대해 조금 더 이야기해 보려 한다.

​새로운 부서에 가면 내가 가장 먼저 공을 들이는 일이 있다. 동료들의 이름을 확인하고 얼굴과 매칭해 머릿속에 집어넣는 작업이다. 이 과정을 이삼일에 걸쳐 수차례 반복한다. 그러고도 며칠 동안은 얼굴을 마주할 때마다 식은땀을 흘리며 이름을 떠올린다.

“OO 씨, 점심 같이 먹을까요?”

말을 뱉고 나서도 속으로는 자문한다.
‘OO 씨 맞지? 맞을 거야. 아니면 어쩌지?’
다행히 대부분은 정답이다. 설령 틀리더라도 아직 익숙하지 않음을 알기에, 상대는 대개 미소와 함께 이름을 정정해 주곤 한다.

​충분히 배려받을 수 있는 실수임에도 마음이 무거운 건, ‘이름’이라는 단어가 가진 무게 때문이다. 이름을 틀렸을 때 나는 내가 지을 수 있는 최대한 미안한 표정으로 사과를 건넨다. 상대의 존재 자체를 오독한 것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다.

​길 위에서, 도서관에서, 혹은 오랜만에 찾은 고향에서 우리는 예기치 못한 ‘기억’과 마주치기도 한다.
십 년, 혹은 그보다 더 오랜 시간이 흘렀어도 분명 반가운 얼굴이다. 내 표정은 서서히 미소로 번지고 입에서는 인사가 터져 나온다.

“야! 정말 오랜만이다!”

분명 동창이다. 초등학교? 고등학교? 아무렴 어때, 오래전 친구임이 분명한데. 하지만 이름이 떠오르지 않는다. 이거 낭패다.
한참을 이름 없이 안부를 주고받으며 대화를 이어간다.
상대의 말속에서 단서를 찾으며 머릿속으로 이름을 쥐어짜 본다.
다행인 건, 상대 역시 아직 내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서로를 대우하고 친분을 쌓아가는 가장 중요한 열쇠는 ‘기억’이다. 그중에서도 핵심은 ‘그가 어떻게 불리는가’에 있다. 이름으로 불린다는 것은 그와 나 사이에 상당한 친밀감의 층위가 쌓였다는 증거다.

​유시민 작가가 어느 프로그램에서 했던 이야기가 떠오른다. 고 노무현 대통령은 아랫사람에게 좀처럼 말을 놓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그에게 반말을 듣는 이들은 오히려 그것을 큰 자긍심으로 여겼다. 유 작가는 자신도 한두 번 반말 섞인 대우를 받은 적이 있다며 은근한 자랑을 비치면서도, 이렇게 덧붙였다.
“그런데 정말 가까운 사람은 ‘이름’으로 불렸어요.”

그 목소리에는 깊은 부러움이 서려 있었다. 이처럼 이름은 누군가에게 가장 귀한 기억이 되고, 소중한 인연은 결국 이름으로 불리며 남는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 김춘수 [꽃]

​인간과 동물을 나누는 기준이 지능이라면, 그 지능의 핵심에는 기억력이 있을 것이다.
어제 밥을 준 주인을 기억하기에 개는 주인을 물지 않고, 어릴 적 고향의 냄새를 기억하기에 연어는 강을 거슬러 오른다.

하지만 인간은 그보다 훨씬 방대하고 정교한 기억을 저장하고 인출해야 한다. 그래야만 비로소 ‘사람’으로서의 도리를 다하며 대우받을 수 있다.

어쩌면 사람이 되기 위한 우리의 몸부림은 그래서 더 처절할 수밖에 없다.

​퇴근길 아내가 부탁한 우유와 달걀을 잊지 않아야 하고,
아이의 생일 선물 할인 일정을 챙겨야 한다.
옆 부서에서 요청한 자료의 마감 기한은 사흘 남았고,
연말까지 자격증을 따야 인사고과에 반영된다.

​나는 오늘도 기억의 책장을 넘기고, 또 기록하는 처절한 몸부림을 이어간다. 잊지 않기 위해, 그리하여 소중한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 애쓰는 나와 당신의 그 고군분투에 깊은 경의를 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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