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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리 Jul 09. 2020

날마다 이별하는

이별은 왜 학습이 안 될까.

우리는 매일 이별하며 산다. 


이별의 대상은 매번 다르겠지만 당장 오늘 지나간 하루도 어떻게 보면 이별이다. 만약 이별이 누군가의 죽음이라면 다시 한번 삶을, 지나온 시간을 되돌아보게 된다. 내가 잘살았나 못살았나 이런 류의 반성이나 성찰이 아닌 결국 우리 모두는 죽는다라는 명제를 다시금 되새기며 그렇게 스스로 내 인생의 철학자가 되는 게 아닐까. 



이런 의미에서 내 생에 첫 이별은 할아버지였다. 학교 끝나고 장례식장에 도착한 나는 상황 파악을 하지도 못한 채 사람이 죽으면 어떻게 되는지 아무것도 모른 채 그냥 엉엉 울었다. 사실 할아버지의 죽음이 마음에 와 닿아서라기보단 엄마가 엉엉 울길래 우는 엄마가 슬퍼서 더 크게 울었다. 



이별의 대상은 모든 것이 될 수 있다. 좋아하는 단골가게, 좋아하는 메뉴가 사라지는 것도 이별이다.  드디어 정 붙이고 가게 된 단골가게는 주변 상권과 거대 자본, 시대의 흐름, 주인의 개인 사정 등으로 사라졌다. 대학교 고학년, 정신없고 어수선한 나이에 혼자 자주 갔던 칼국수집은 졸업과 함께 문을 닫았다. 새로 이사한 동네 떡볶이집에서 포장할 때마다 '이 동네를 떠날 때 분식 하나로 날 행복하게 해 준 사장님에게  핸드크림 하나 선물해야지' 생각하곤 했는데  그녀는 나보다 먼저 그 동네를 떠났으니 내겐 적잖은 시련이었다. 마찬가지로 어린 시절 일기장에 하루 걸러 등장한 분식집 또한  초등학생 무렵 홍수에 잠겨 문을 닫았다. 20대 중반 좋은 영화 마음껏 본 삼청동 독립영화관도 결국 영업을 종료했다. 이제 막 재미를 느낀 요가 아쉬탕가 선생님도 지난주 마지막 수업을 하셨다. 



 이별이 있을 거라 생각도 못한 절절한 사랑은 또 어떠한가. 예상치 못했기에 이별의 슬픔은 배가 된다. 사랑하고 애정이 클수록 이별은 힘들다. 인생에 무수한 경험이 오늘의 나를 단단하게 만듦에도 불구하고 이별은 학습이 안 된다. 이별할 걸 안다고 해서 슬픔이 덜하지 않다는 사실만 알게 될 뿐이다. 다만 몇 번의 이별에 고마운 점이 있다면 이 세상 모든 예술을 이해하는 데 나의 오감을 확장해주었다. 노래, 영화, 소설, 시, 그림 등 왜 그 많은 작가들이 사랑과 이별을 노래했는지 이제는 알 것 같다.  심지어 인류 역사상 어떤 전쟁은 사랑에 눈이 멀어 발생하기도 했으니까.



그런데 살면서 영원히 이별하지 않는 존재가 딱 하나 있다고 한다.  바로 나 자신. 나와 이별할 일은 없고 내가 시련을 줄 일은 더더욱 없기에 좋은 곳 있으면 나를 데려가고 맛있는 음식이 있으면 나에게 맛보게 한다. 좋은 사람 있으면 나에게 소개해주고 좋은 노래가 있으면 내게 들려준다. 내가 힘들면 내 얘기를 들어주고 쉬게 해 준다. 내가 외로우면 나의 내면을 채워주는 책을 읽거나 친구를 만나 푸념하고 위로받게 해 준다. 내게 해로운 사람은 나로부터 멀리 하고 나를 다독여준다. 내 마음이 지금 나에게 어떤 말을 하는지 무엇이 가장 필요하고 중요한지 귀 기울인다. 나에게 집중하는 시간은 하루에 과연 얼마나 될까. 그렇게 매일매일 나를 사랑하고 나와 연애하는 마음으로 살다 보면 이 세상 모든 이별을 이겨내는 힘은 결국 내게서 나올지도 모른다. 





겨울 런던, 영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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