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안 개구리의 뚜벅 여행기
목적지도 여행일수도 미정인 여행에 다녀왔다.
정해진 것은 없다. 발길 닿는 대로 마음 가는 대로 향하는 여행. 오롯이 혼자 감내하고 혼자 영유하는 여행이다. 오전 8시 용산역 도착. 별다방 쿠폰을 쓰고 바게트 샌드위치를 먹어야지 생각했는데 아침부터 푹푹찌는 더위에 지치기도 하고 숨을 고를 시간이 필요하니 바로 앞에 보이는 커피빈 모닝세트에 홀려 들어간다. 역시나 예정대로 흐르지 않는다. 따뜻한 라떼에 머핀을 하나 시켜 입에 가득 베어 물고 행선지를 알아본다.
당장 50분 뒤에 출발하는 여수 expo ktx행. 순천, 여수, 구례 중 어디로 향할까 잠시 고민하다 표를 예매하고 순천역에서 내렸다. 역시나 그늘 한 점 없는 뜨거운 남부 도시. 역에 내려 곧장 오른쪽에 보이는 관광안내소에 들어갔다. 선암사 가는 버스를 기다릴 겸 잠시 더위도 식히고 넉살을 부리며 여기 뭐가 맛있냐고 여쭤본다. 아무 계획 없이 온 내가 딱해 보여서인지 그냥 귀여워 보여서 인지는? 모르겠으나 안내사분께서 친절하게 나의 여행코스까지 짜주신다. 느낌이 좋다. 그렇게 나는 12시 버스를 타고 선암사로 향했다.
선암사에 온 이유는 야생차 체험관이었다. 더운 날씨 탓일까 사람은 없었고 덕분에 명당자리에 앉아 땀을 식히며 뜨거운 녹차 한 사발을 마신다. 이열치열이 따로 없다. 녹차 새 잎, 산들바람, 뭉게구름, 점점 다가오는 가을 냄새. 오감 미각 시각 후각 촉각이 연신 나와 호흡을 맞추며 그렇게 나의 오감은 호사를 누린다.
선암사엔 잠시 들려 언제나 그렇듯 대웅전에서 여행의 안녕을 기원한다. 여행지의 성당이나 절에 들어가 여행을 시작하는 것은 나의 루틴이자 '걸어서 세계 속으로'에서도 보여주는 공식 루틴이기도 하다. 여행의 안녕을 기원하는 것. 어쩌면 삶의 안녕일지도 모르겠다.
순천 시내에서 선암사까지는 왕복 2시간 정도이기에 오후 차를 타고 내려와 시장에서 내렸다. 볼 카스텔라가 유명한 순천 시내에서 혼자 기웃거리니 감사히도 낱개로 팔아주셨다. 카스텔라 볼과 찹쌀떡을 하나씩 사고 곧장 양조장으로 가서 맥주 한 사발과 빵을 먹었다. 웃음이 절로 난다.
허기를 잠시 달랜 뒤 역 근처 게스트하우스로 가서 체크인을 했다. 본래 4~8인실 도미토리이나 오늘은 사람이 없어 한 방에 한 명씩 배정해주었다. 이번 여행이 잘 굴러갈 모양이다.
본디 순천은 기깔난 전라남도 밥상, 꼬막, 주꾸미 등 상다리 부러지는 한정식이 유명하나 오늘 더위를 너무 많이 먹어서인지 밥이 당기지 않은 나는 시내에 유명한 삼겹살 집으로 향해 인생 최초 '혼 고기'에 도전했다. 여행은 이토록 사람을 무모하고 용감하게 한다. 다행히 줄은 없었고 내 앞에 마주 앉아 사장님이 구워주는 고기를 먹으니 맥주를 또 마시지 않을 수가 없다. 이건은 핑계가 아닌 불가항력. 여름 맥주는 왜 꿀일까. 꿀꺽꿀꺽 맥주 한 입에 삼겹살은 쉼 없이 입으로 향한다.
혼자 여행할 때 외롭지 않냐는 질문을 종종 받는다. 신기하게도 혼자 다니면 생기는 작은 공백을 누군가가 혹은 무언가가 채워준다. 버스 정류장에서 한 마디씩 주고받는 어르신들, 마주 앉아 고기를 구워준 사장님, 각 잡고 여행코스까지 짜주는 관광안내사분, 지나가다 마주친 고양이, 두꺼비 등. 그래서 혼자 하는 여행에 외로움이 비집고 들어올 틈이 없었나 보다. 혹 외로움을 마주해도 뭐 어떤가. 청승떨며 외로움을 오롯이 받아들이는 것도 여행의 일부인 것을. 그렇게 오면 오는 대로 가면 가는 대로 받아들이고 놔주는 단순한 삶을 살면 좋겠다.
어쩜 이렇게 쉬운 걸, 어플로 표 예매하고 기차 한 번 타면 대한민국 방방곡곡의 정취와 계절을 느낄 수 있다. 이리도 간단한 걸 이제서야 하다니 오늘 하루 내내 걸으며 나는 '서울 속 개구리'였구나 생각했다. 아쉬운 것은 2인 이상 주문받는 음식점 뿐. 그렇게 순천에서의 오묘하고 충만한 하루가 지나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