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안 개구리 뚜벅 여행기
'뽕 짝 뽀옹 짝 뽕 짜악~~'
오늘 아침을 경쾌하게 깨우는 창문 넘어 뽕짝 테이프 소리. 말로 형용할 수 없는 도시의 활력이 살포시 느껴진다. 시골생활에 익숙한 나에게 이 뽕짝 메들리는 낯설지 않다. 보통 시골에서 이 트로트가 울리며 도시가 경쾌해진다면 그것은 '장날'일 게다.
하천을 걸어 아침 산책을 하다 간단하게 빵을 먹고 오늘은 다시 어딜 가야 하나 생각한다. 이대로 서울에 가자니 아쉽고 순천엔 다시 돌아 올 이유를 남겨두어야 하니, 어쩔까 저쩔까 하다 서울에 가는 길에 도시 한 곳에 들려 점심을 먹기로 맘먹는다.
사실 아침에 먹은 빵이 소화도 되기 전이다. 요즘은 각 지역 여행에서 필수 코스처럼 빵집이 등장한다. 내가 나고 자란 도시에도 관광객들에게 유명한 베이커리가 있어 필수코스로 자리 잡았으나 사실 나는 그 베이커리에서 파는 빵은 제대로 먹어본 적이 없다. 아마도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먹을 수 있을 거라는 생각 즉 한정판과 같은 희소성 있는 상품이 먼저 팔리는 이치처럼. 그러니 지역 유명 베이커리에서 내세우는 시그니처 메뉴를 먹는 사람이라면 아마 관광객일 가능성이 농후하지 않을까. 적어도 나는 현지인과 외지인을 그렇게 구분하고 얼추 높은 확률로 맞추는 감이 생겼다. 그래서 오늘 나는 이 지역의 외지인이니 관광객에게 더 잘 팔리는 빵을 아침으로 먹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점심은 남원에서 추어탕을 먹자. 그렇게 나는 서울로 돌아갈 것이다.
역시나 예상은 빗나가지 않았다. 오늘은 아랫장이 서는 날. 해외여행에서만 시장이 즐거운 것이 아니다. 국내 여행에서 만나는 각 지역 오일장, 시골장 또한 그 매력이 넘실댄다. 각 지역 그 계절에 나오는 제철 재료를 구경할 수 있고 주민들의 언어를 가장 가까이에서 느낄 수 있으며 현지인들의 삶을 엿볼 수 있는 장날은 놓칠 수 없다. 정겨운 방언과 풍요로운 농산물 그리고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저렴한 가격. 특히 탐스러운 복숭아가 제 세상을 맞았다. 딱 하나만 사 먹을 수 있을까.
"한 개도 파나요?"
"고럼, 골라봐"(사투리 잊어버렸어요.)
시장 골목 안쪽으로 들어가 보니 아침부터 전냄새가 샤넬 넘버 5 뺨친다. 전은 못 참지. 게다가 아직 이 지역 술도 아직 맛보지 못했다. 사실 어제 뻘에서 본 칠게의 잔상이 진했다. 그렇게 사랑스럽게 바라봐놓고 오늘 칠게 튀김을 먹을 생각을 하다니 인간은 참 알 수 없다.
"한 명이에요. 막걸리도 주세요. 순천 막걸리"
고소한 칠게튀김에 밑반찬도 정갈하고 아침이니 유산균!
내 앞에서 이미 한 잔 걸치고 계신 할머니 세 분이 정겹다. 아침부터 소주라니가 아니라 아침에도 소주를 잡수시는 저 할머니들처럼 늙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돌아가신 할머니 생각도 나고... 그러다 나를 보시며 "저 막걸리 먹는 거 보소"(사투리가 생각이 안 나네요) 하신다. 그리하여 나도 모르는 넉살이 또 쏟아진다.
"저 잘 먹죠? 블라블라~"
그 뒤로 들어온 어머님 세 분은 육전에 카스 2병을 후딱 비우셨다.
막걸리 한 병 걸치고 역으로 향한다. 남원에 들려서 추어탕 한 그릇 먹고 가자. 어플 하나로 좌석을 예매하고 역에서 내려 보이는 관광안내소에 가면 각종 지도, 현지 먹거리를 안내하는 책자가 넘친다. 여행을 혼자라도 가지 않을 이유가 없다. 그저 필요한 건 그냥 '하는 것' 그리고 약간의 '넉살'
남원에 내려 버스를 탔다. 이제는 기사님들을 보면 대화를 즐기시는 분인지 혹은 과묵하신 분인지 알아볼 수 있는 감이 생겼다. 다년간 혼자 여행이 나에게 준 데이터, 통계랄까. 이번 시내버스 기사님은 딱 보아도 대화를 좋아하시는 분 같다. 역에서 출발한 버스에 승객도 없고. 그렇다면 나는 나도 몰랐던 내 안의 모든 곰살맞음을 방출할 용기가 샘솟는다.
"기사님~ 여기 뭐가 맛있대요?"
기사님들은 대개 현지분들이기도 하고 각 지역 맛집을 꿰뚫고 계실 확률이 높다. 깔끔하고 정갈한 음식점을 원한다면 어머님들께 여쭤보고 얼큰하고 맛있는 식사를 원한다면 아버님들에게 여쭤보자. 이번 버스 기사님은 음식점 이름과 함께 몇 번이고 가는 길을 알려주신다. 여행에서 만나는 우연한 행운이요 이러한 우연이 다시 이 도시로 돌아오게 하는 원동력이 되기도 한다. 또 도시의 이미지이자 나도 누군가에게 친절을 베풀자 다짐하는 가르침이 될 수도 있다. 기사님 덕분에 얼큰한 추어탕 한 사발을 들이켜고 흡족한 나는 가족들을 위해 택배 주문까지 마쳤다. 기차 시간은 두 시간 뒤로 여유롭게 잡아 놓고 근처 대장간에 갔다.
가끔 나도 나를 잘 모를 때가 있다. 갑자기 대장간이라니. 순천으로 오는 기차에서 본 ktx 발간 잡지에서 도시 '영주'를 소개했고 그 안에 대장간 코너가 있었다. 그 여운으로 남원 대장간을 검색했다. 남원은 춘향이뿐만 아니라 남원 칼로도 유명한 도시라고 한다. 특히 여성 대장장이가 있다니. 나의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하다. 그리하여 대장간에서 분점처럼 운영하는 가게에 들러 호미와 칼을 샀다. 판매하고 계시는 할머니는 대장장이의 언니라고 하셨다.
사실 k호미라 생뚱맞을 수도 있지만 앞으로 기후위기나 재난이 닥쳤을 때 노트북보다 필요한 것은 어쩌면 몇천 원짜리 호미일지도 모른다는 나만의 나름 생존전략이었다. 마치 전염병 앞에 값비싼 사치품보다 몇 천 원짜리 마스크가 품귀현상을 겪었던 것처럼.
가게에서도 내 넉살과 주접은 이어졌다. 말로 천냥 빚을 갚는다고 기분 좋게 오고 가는 덕담 한 마디에 적적한 오후를 보내고 계신 할머니에게 잠시나마 웃음꽃을 드릴 수 있다면 내 주접은 헛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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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정말 맛있어요"
"어쩜 김치가 이렇게 맛있대요"
"제가 먹어 본 오미자차 중에 제일 맛있어요"
"정말요? 60대인 줄 알았는데?"
혼자 떠난 2박 3일 동안 대략 20~30명과 스몰 톡을 나눴으니 혼자 떠난 여행에 외로움이 비집고 들어올 틈을 주지 않았던 것 같다. 책을 한 권 샀고 지역 막걸리 한 병과 지역 생산 복숭아 하나, 농협에서 파는 지역 매실즙을 한 팩 사 먹었다. 덥거나 추울 때 프랜차이즈 카페에서 한 잔 마시는 것보다 지역 농협에서 파는 제품으로 만든 즙이나 차를 마신다면 좀 더 여행하는 기분을 느낄 수 있다. 기념품으로 k호미와 부엌칼을 샀고 가족을 위한 선물로 추어탕 택배를 보냈다. 가장 유용한 옷은 셔츠였는데 여름날 셔츠는 실내 에어컨 바람에 체온을 보호하기도 좋고 뙤약볕에 양산 대신 뒤집어쓸 수 있으며 정 급하면 수건 대용으로도 가능하다. 다음에 필요하다고 생각한 건 빨래망. 짐 없이 떠나다 보니 중간중간 빨래가 가능할 때 빨래망이 유용할 것 같았다. 보조 주머니처럼 쓸 수도 있고.
우연히 마주친 현지 서점에서는 책 한 권을 살 수 있느니 다음 여행엔 굳이 책을 챙기지 않아도 될 것이다. 여벌 옷, 속옷으로도 3일은 지내니 여행할 때마다 드는 생각이지만 사실상 삶을 살면서 대단하고 많은 짐은 필요가 없다. 물론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면 이 사실을 망각하고 또 망각하지만...
그래서 여행은 어디서부터 시작되고 어디로 흘러 어디에서 마무리되는 것일까. 일상의 하루도 여행처럼 살 수 없을까. 매일 반복되는 하루 안에 작은 여행을 갖는 건 어떨까. 한 숨 돌리며 차 한잔. 기대리던 밥 한 끼. 짧은 산책 등. 의무로 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나를 위해서 하루 10분, 1시간의 여행을 하는 것이다. 어차피 삶도 지구에서의 여행아닐까. 그러니 복날이면 백숙 먹고 스포츠 경기 보면 치맥 먹고 새해엔 떡국 먹고 정월 대보름엔 오곡밥과 나물 먹고 추석엔 송편 먹고 동지에는 팥죽 먹고 그렇게 유랑하듯 방랑객처럼 살면 참 좋겠다...고 생각한 어느 뜨거운 여름날의 여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