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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리 Apr 24. 2023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

통역을 하다 나는 생각하네  


오랜만에 통역을 했다.


사실 익숙한 주제가 아니라면, 급하게 연락 온 통역은 가급적 잘 맡지 않으려고 한다. 사전 준비가 미흡해 의뢰 측이나 통역사나 위험부담이 크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번에도 고민고민 끝에 거절했는데 다시 연락이 왔다. 의뢰 측의 급한 마음이 느껴졌다. 지방에서 서울로 당일에 올라가야 할 만큼 급한 일정이었는데 나는 그냥 알겠다고 가겠다고 했다.


나의 백수생활도 덩달아 끝이났다. 아주 오랜만에 일찍 일어났다. 재킷에 바지 구두라는 작업복장과 함께 아주 오랜만에 인간 행색을 하고 출근하는 사람이 됐다. 비가 와서 그런지 서울 도착해 차가 꽤나 밀렸다. 터미널에 도착해 급하게 통역 노트를 사고 약속 장소로 이동했다.


2년 만에 오는 서울의 이곳저곳은 변함이 없다. 다만 코로나가 끝나가서인지 길거리는 외국인으로 북적북적하다. 약속시간 보다 두 시간 정도 미리 도착해 근처 카페에서 한숨 고른다. 지금 내 옆에 여행 중인 외국인 노부부가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다. 불과 나도 2개월 전 볼리비아를 여행하고 있었는데, 통역 상황이 가늠이 안돼 긴장이 더해지니 당장 고민 없어 보이는 저들이 너무나도 부럽다. 인간의 마음이 이렇게 간사하다.


시간은 다가오고 통역 전 사전 미팅 겸 업체 측과 만났다. 중남미 머나먼 곳에서 온 사람들은 여유가 가득해 나의 긴장을 같이 풀어주었다. 통역내용은 기밀 성격이 강해 당일 협업으로 진행됐다. 간신히 상황설명을 듣고 회의에 들어갔다. 오늘 통역은 협상이었다.


회의 시간이 점차 길어지면서 나 또한 긴장을 늦추고 차분해졌다. 다행히 의뢰 측 도움을 받아 통역은 무사히 진행됐다. 대학원 재학 당시 교수님께서 협상 통역만큼 힘든 통역은 없다고 하셔서 더 긴장한 탓도 있다. 기브 앤 테이크가 확실한 만큼 서로가 원하고 줄 수 있는 것이 분명해야 했다. 아울러 대게 이런 협상은 큰돈이 오고 가는 만큼 서로가 원하는 것과 얻을 수 있는 것을 확실하게 전달해야 한다. 통역사는 협상이 성사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사람의 마음을 각자의 언어로 오해 없이 전달하기 위해 애쓴다. 하지만 신뢰는 돈으로 살 수 없다. 결국 협상의 성패는 마음에 달려있기 때문이다. 물론 억만금을 준다는 것 만으로 서로의 신뢰를 확인할 수 있지만 이 경우는 정말 돈이 목적인 경우다. 그나마 돈이 가장 깔끔한 수단이 될 수 있다.  그래서 모든 가치를 자꾸만 돈으로 환산하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람 사는 일에는 결국 돈 이상의 무언가가 따른다.


통역을 마치고 후련한 마음에 근처 바에서 하이볼 한 잔을 마셨다. 그리고 생각했다. 우리는 살면서 수많은 비즈니스를 하고 있다. 주는 것만으로도 만족하면 세상이 아름답겠지만 이거야 말로 부처의 삶일 것이다. 내가 좋아서 주면서도 알게 모르게 무언가를 상대에게 바라고 있다. 그래서 기대하고 결국 실망해서 혼자 화를 낸다. 이 세상에 내 마음 같은 사람은 아마 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런데도 타인에게 내 마음 같기를 기대한다.


마찬가지로 누군가를 신뢰한다는 게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신뢰는 돈으로도 회복이 어렵고 경우에 따라 트라우마를 남긴다. 신뢰를 저버린 경험을 하면 또다시 누군가를 신뢰하기 어렵다. 그렇게 신뢰를 저버리고 쌓고 반복하다가 스스로 강해질지도 모르고 더더욱 약해질지도 모른다. 신뢰는 사람을 만들기도 하고 사람을 망치기도 한다. 평생에 누군가를 신뢰해 본 적이 있다면, 내게 신뢰를 주는 사람을 만난 적이 있다면 그 자체만으로도 엄청난 행운이자 경험이 아니었을까...


협상 통역을 하다 신뢰에 대해 고찰한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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