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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리 Apr 08. 2023

백수가 되고 나는 쓰네.

백수도 합법적으로 쉬어도 되는 주말에

나의 백수 생활이 50일에 접어든다.


매일매일 쉬면서도 주말이 오면 더 좋다. 다 같이 합법적으로 쉬는 것 같아서 마음이 편하기 때문이다. 물론 주말에 사람들이 많이 몰리는 곳은 가지 않는다. 평일을 열심히 살아낸 사람들이 즐길 수 있게, 나는 평일에 가면 되니까. 백수지만 나도 그 정도 양심은 있다.


어쩌면 아직 내가 쉴 자격이 없다고 스스로를 채찍 해서 그냥 쉬어도 될 것을, 평일에 쉬고 있다는 죄책감을 놓지 못한 것 같다. 사지멀쩡한, 정규교육을 받은 성인이 쉬고 있는 이 상태를 스스로 받아들이지 못해서 지난 50일 중 평일은 불편하게 쉬었다. 특히 지금 서울집과 해외생활을 정리하고 본가에 머물고 있어 너무나도 적나라한 백수생활을 평생 성실하게 사신 부모님에게 노출해야 하니 그 부끄러움이 나를 자꾸 도망치게 만들었다.


해외에서 일을 마치고 돌아왔기 때문에 처음 2주 정도는 시차적응한답시고 나름 이유를 갖고 쉬었다. 나도 내가 저녁 6시부터 잠에 들 줄은 몰랐다. 태생이 아침형 인간에 잠이 많지 않은 사람인데 그렇게 하루에 꼬박 16시간 정도를 잤다. 저녁을 먹고 바로 자고 티비를 보다가 잠이 들고 계속 잠만 잤다. 나도 인지하지 못한 채 대륙을 넘나드는 일은 엄청난 에너지 소비를 했나 보다고 처음 생각했다.


그리고 다음 한 달 정도는 정말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한국에 오면 봄에 제주도도 가고 남도지방도 가야지 했는데 기차와 비행기 사이트까지 접속만 하다 말다 그만두었다. 헬스를 다녀 볼까 며칠 마음먹었다가 헬스장 문 앞에서 다시 돌아왔다. 예쁜 봄 옷을 사면 의욕이 날까 싶었는데 한두 번 돌아다니다 뭐 굳이 갈 곳도 없는데 하다가 그냥 빈 손으로 나왔다. 공부를 다시 해야지 싶어 여기저기 사이트를 기웃거리고 음성파일을 듣다가 말았다. 어느 하나 꾸준히 한 것 없이 아무 규칙 없이 한 달을 보낸 건 아마도 내 생에 처음 겪는 일이다.


난 항상 무엇을 해왔다. 해야만 할 때도 있었고 하지 않아도 될 때에도 무언가를 했다. 생산적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쉬는 것도 그냥 쉬지 않았다. 장아찌나 저장음식을 만들어 놓고 분갈이라도 했다. 쉬어도 어딜 꼭 가야만 하고 먹어야 하고 읽어야 하고 말해야 했다. 산책을 하기 위해 가고 싶은 카페나 음식점이라는 목표점을 찍어두고 걸었다. 기차를 타면 앞에 있는 안내서까지 읽었다. 엘리베이터를 타면 벽면에 붙인 광고라도 본다. 영화를 보면 음성과 자막번역의 싱크를 생각했다. 무언가를 먹으면 맛이 어떤 지 분석했다. SNS에 후기를 남기고 하루를 저장했다. 여태 나는 그렇게 살아왔다.


어쩌면 일종의 굴레다. 쉬면 일하고 싶고 일하면 쉬고 싶다. 맛있는 걸 먹으면서 살은 안 찌고 싶다. 사랑은 하는데 상처는 안 받고 싶다. 돈을 쓰면서도 모으고 싶다. 로또는 안 사면서 복권에 당첨되고 싶다. 시원한 걸 마시고 싶은데 얼음은 녹지 않았으면 좋겠다. 혼자 살 수 없는데 혼자 있고 싶다. 비가 내리면 좋겠는데 꽃잎은 안 떨어졌으면 좋겠다. 누군가에게 의지하고 싶은데 중심은 잡고 싶다. 쓰고 보니 명확해진다. 나는 도라이구나.


결국 답을 알기 때문에 스스로를 고통 속에 넣고 있다. 이럴 때 장단점을 적어보면 어느 정도 도움이 된다. 장점의 반대는 곧 단점이 되니 백수와 일의 장점만 적어볼까. 명확하게도 일을 하는 것과 일을 하지 않는 것의 장점이 상충한다. 이래서 인생에 정답이 없나 보다.



(다시 백수의 주말로 돌아와) 몇 년 전 생긴 동네 카페가 있다. 처음 생겼을 때 가보고 싶긴 한데 일종의 룰이 많은 카페여서 거부감이 들었다. 조용해야 하고 이용 시간도 제한적이고 주의점이 많은 카페. 그래서 뭐 저렇게 까탈스러운가 싶어서 몇 년을 가지 않았다. 그런데 오늘 자매를 따라 카페에 오니 세상에 공간이 너무 좋았다. 고요하고 평화롭다. 바람에 흔들리는 새 잎을 보며 움직임을 관찰했다. 이렇게 한자라도 끄적였다. 어차피 이용 시간만 지키면 되니 사람이 많든 적든 언제 가네마네 더 눈치 볼 필요도 없다. 손님들은 자연스럽게 조용하게 책을 본다. 공지사항에 적어 둔 규칙은 결국 이 안에서 모두 사라졌다. 직접 겪어보지 않은 편견은 스스로 깨야하는 거구나. 상대가 아닌 내가 깨는 거구나. 오늘 하나 배웠으니 오늘 하루는 백수치고 잘 살았네! 그리고 이렇게 다듬어지지 않은, 생각나는 대로 적는 글을 읽고 좋아해 주시는 누군가에게 감사함을 느끼며...



백수 생활의 장점은 사람 스트레스가 없다. 눈치 보지 않아도 된다. 온전히 내 시간을 쓸 수 있다. 읽고 말하고 듣고 쓰지 않아도 된다. 밖에서 똑똑한 척 안 해도 된다. 사계절을 느낄 수 있다. 사색할 수 있다. 나를 돌아볼 수 있다. 충동적으로 움직여도 된다. 하루를 온전하게 느낄 수 있다. 어디든 갈 수 있다. 긴장하지 않아도 된다.


일의 장점은  스스로를 먹여 살린다는 자신감이 생긴다. 일을 하고 돈을 버는 것만으로도 다른 일은 하지 않아도 된다는 편안함이 든다(운동, 취미 등등). 그냥 주어진 일만 하면 된다. 성취감과 보람이 나를 앞으로 나아가게 한다. 누군가를 만나도 당당하다. 규칙적으로 생활하면서 사람구실을 한다. 시간을 쪼개어 바쁜 틈을 타하는 일은 모든 즐겁다. 원하는 것을 돈으로 살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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