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공리 Jul 30. 2023

동물을 사랑한다는건

내겐 너무 무해한 존재

나는 사랑에 빠졌다.


인간이 아닌 생명체를 사랑한 건 처음이다. 다른 종족에게 아련한 사랑의 감정을 느끼는 게 놀랍다.

초반엔 그저 귀여웠다. 재취업 과정에서 발현된 백수의 불안함과 갑작스러운 헤어짐 등 이것저것 마음이 방황하는 시기가 맞물려 시선을 돌리고 집중할 새로운 무언가가 필요했다고 생각했다. 방구석에 박혀서 핸드폰만 있으면 그녀의 움직임 하나하나 밥 먹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우울한 터널을 견딜 수 있게 해 줘서 고맙다고 생각했다. 통통하고 예쁘게 생긴 판다라는 동물이 신기했다. 그러다 사육사와의 교감을 보면서 나도 모르게 스며들어버렸다. 어떠한 동물이 아닌 하나의 생명체로 하나의 존재로 내게 다가왔다.


정확히 내 마음을 들여다보면 사랑만 듬뿍 받다가 아무것도 영문도 듣지 못한 채 고향을 떠나야만 하는, 사랑하는 존재로부터 이별당해야 하는 그 생명체에 감정이입을 하고 연민을 느낀 것 같다. 인간은 남녀 혹은 가족, 친구 등 영원할 것만 같았던 존재와 평생 이별하며 산다. 갑작스러운 이별도 태반이지만 적어도 싸움의 과정이나 식어버린 과정, 실망하고 울고 털어내며 차이를 인정하고 이성적으로 이별을 받아들일 수 있는  과정을 겪을 순 있다. 하지만 푸바오는 영문도 모른 채 이별을 당해야 한다. 태어나는 순간 자체가 축복이요 매일매일 사랑을 받다가 상황을 이해하기도 전에 해외로 강제이주를 해야 한다. 심지어 아기다. 이 순수한 아기판다 앞에는 그렇게 사랑하는 모든 존재로부터 하루아침에 헤어져야 하는 운명이 놓여있다. 동물원에서 태어나 하루종일 먹고 자는 하루 일과를 보내는 판다를 과연 부럽다고 할 수 있을까. 너무나도 기구하다. 이런 시련을 겪어야 하는 아기판다 앞에서 인간인 내가 겪은 이별은 적어도 덜 충격적이지 않은가 하며 얄궂은 마음으로 푸바오를 동정했는지도 모른다.


물론 사랑받은 힘이, 그 자존감으로 어딜 가든 건강하게 잘 살 수 있도록 그녀를 지탱해 줄 것이다. 언어가 통하지 않는 낯선 환경에서의 새 시작은 고통이 수반되지만 아기 시절의 기억이 평생을 살아갈 에너지를 줄 수도 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인간중심 시각에 기인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외교? 야생동물 보호? 그것들은 불가역적인 영역이 아니다. 천재지변 같은 일이 아니다. 인간의 영역이고 인간이 만들어냈으며 인간이 상황을 조율하고 통제할 수 있는, 그야말로 '명목'에 불과하다.  


푸바오를 사랑하면서 나의 세계가, 나의 사고 또한 자연의 영역으로 확장되고 있었다. 판다를 보며 하는 행동이 '정말 사람 같다', '사람처럼 해서 신기하다'라고 생각하는 나를 보며  정말로 인간중심적이라고 느꼈다.  인간이 뭐라고. 동물이 인간이라는 종족을 보면 정말로 우리 종족같이 행동하네?라고 역으로 느낄지도 모른다. 인간은 이 광활한 우주에 사는 하나의 종에 불과하지 않은가. 생각이 깊어지다 보니 동물원이라는 공간 자체에 회의감도 든다. 무엇이 진정으로 동물을 위한 일인가. 나는 눈뜨자 마자 잠들기 직전까지 틈틈이 그녀의 사진을 찾아보지만 직접 찾아가 그녀를 눈앞에서 볼 자신이 없다. 그녀의 세계엔 내실과 방사장만 있다는 불편한 진실을 나 또한 마주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회의감도 불편한 진실도 뛰어넘는 무언가를 사랑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바로 사육사와 동물 간 교감이다. '종'을 뛰어넘는 신뢰와 사랑이 존재하는 걸 확인한 것만 같다. 어쩌면 무한한 신뢰와 사랑이 가능한 이유는 인간이 판다에게 즉 동물에게 바라는 바가 없기 때문이 아닐까.  무조건 적인 사랑은 보통 인간 부모가 자식에게로 향하는 사랑에 비유되는데  때론 부모 개인 욕심으로 '건강하게 자라만 다오'라고 했던 과거의 바람을 망각한다. 따라서 욕심이 개입되지 않은 인간과 동물 간 사랑이 어쩌면 더 무조건적이고 순수한 사랑일지도 모른다. 인간은 판다가 건강하고 행복하기 만을 바란다. 아기판다 또한 인간을 속상하게도, 실망하게 할 일도 없다. 그저 순수하고 무해한 영혼의 생명체다. 푸바오가족을 보며 편안한 마음과 치유의 감정을 느끼는 이유가 바로 이런 점이 아닐까. 적어도 나는 그렇다(물론 푸바오가족은 인물이 뛰어나다).


최근 푸바오의 쌍둥이 동생들이 태어나면서 그녀의 행동에도 미묘한 변화가 관찰됐다. 평소 사육사할부지들의 케어가 자연스레 산모와 새 생명으로 추가되다 보니 그만큼 푸바오가 독점하던 관심의 시간은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물론 새로 태어날 쌍둥이들도 얼마나 예쁠지 상상이 안될 정도다. 그러나 푸바오는 첫 정이다. 첫 정은 아련하고 지독하다. 인간 세계에서 보면 첫사랑이 그렇지 않을까. 평생 처음 느껴보는 열렬한 감정을 느끼게 해 준 대상. 내게 새로운 세계를 알려준 존재. 그래서 그 뒤에 또 다른 사랑이 찾아와도 첫사랑에 느낀 감정을 뛰어넘기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첫사랑을 느낀 당시의 내가 바로 무해하고 순수한 영혼이었기 때문이다.


푸바오를 사랑하며 지난한 여름날을 이겨내고 있다. 헤어져야 하는 운명을 갖고 태어난 영원한 첫사랑, 인간과 동물 사이에 무조건적인 사랑과 교감, 자본과 외교의 불편한 진실 등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바오네 가족은 나의 세계관과 이해의 영역을 확장시켜 주고 있다. 뚠빵이는 정말이지 내게 너무 무해하다.



작가의 이전글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