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B급이라고 말하지 마
나는 ‘공씨아저씨네’라는 온라인 구멍가게를 운영하고 있는 과일 장수다. 농사의 농자도 모르는 채 이 일을 시작한 지 벌써 7년 차에 접어든다. 막상 일을 시작해 보니 농산물 유통구조는 나의 상식으로는 이해가 안 되는 것 투성이었다. 사회에 만연해 있는 '외모 지상주의'가 농산물 시장에서도 뿌리 깊게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은 큰 충격이었다. 그래서 나는 '크기'와 '모양' 중심이 아닌 과일 본연의 '맛'과 '향' 중심의 조금 다른 과일 유통을 시작했다.
현재 농산물은 크기와 모양에 따라 ‘상품성’을 평가하고 그 기준으로 값을 매긴다. 크기가 작거나, 못생긴 과일은 싸야 한다. 이것이 우리의 상식이다. 상식? 아니다. 분명히 상식은 아니다. 그러나 염연한 현실이다. 그래서 ‘B급’, ‘흠과’, ‘못난이’, '파치'와 같은 말들이 생겨나게 되었다.
이른바 ‘B급’으로 분류되는 농산물은 어떤 것인가? 크기가 작거나, 모양이 예쁘지 않거나, 겉 표면에 흠집이 있거나 하는 농산물이다. 오이가 일자로 곧게 뻗지 않고 살짝 휘어도 B급이고, 호박도 마찬가지이다. 나는 이 농산물들을 다른 일반 농산물과 똑같이 팔면서 B급이라는 꼬리표를 걷어내주고 싶었다.
못생겨서 죄송합니다.
과일은 공장에서 찍어내는 공산품이 아니다. 땅과 자연환경 그리고 농부의 땀과 노력이 어우러진 예술작품이다. 그러나 시장에서는 크고 예쁘며 일정한 크기와 생김새의 농산물에 좋은 가격을 준다. 그렇지 않은 것에는 형편없는 가격이 매겨지는 것이 현실이다. 과일은 맛있으면 그만 아닌가? 왜 커야 하고 왜 예뻐야 한단 말인가? 크고 예쁜 과일을 만들기 위해 어떤 일들이 벌어지는지 소비자들은 과연 알고 있을까?
바닥에 깔려있는 반짝반짝한 것의 정체는 무엇일까? 반사 필름이다. 사과밭에는 왜 가을이 되면 반사필름이 깔려 있을까? 가장 큰 이유는? 색을 예쁘기 내기 위해서다.
자연의 순리대로 자란 사과의 하단 부분은 위의 사진과 같이 빨갛지 않다. 이유는 햇빛을 많이 받지 못해 색이 들지 않았기 때문. 이러한 현상은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우리가 시중에서 보는 사과는 위아래 모두 빨갛다. 모두 반사 필름을 통해서 아랫부분까지 색을 내기 때문이다. 색을 예쁘게 내는 이유는?
사과는 빨개야 시장에서 가격을 잘 받기 때문이다. 물론 반사 필름은 사과에 화학적 처리를 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사과에 해를 주는 것은 아니다. 다만 저 반사필름은 소모성 자재로 나중에는 농업 폐기물이 될 것이고 깔고 걷는 일에는 누군가의 노동력이 투입되어야 할 것이다. 환경을 지키고 이어나간다는 농업의 다원적 기능을 생각한다면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좌측 사진에서 연두색으로 보이는 자국은 왜 생긴 것일까? 사과 잎이 매달려 있어서 햇빛을 받지 못해 색이 빨개지지 못한 부분이다.
그래서 사과 농가에서는 보통 사과의 색이 날 시기가 되면 위의 사진과 같이 잎을 잘라주는 잎 소지 작업을 하게 된다. 연두색 얼룩이 생기지 않게 하기 위해서이다.
엄청난 노동력이 필요한 작업이다. 농촌의 부족한 노동력을 생각하면 얼마나 비효율적인 작업인가를 생각하게 된다. 이 작업 역시 시장에서 빨간 사과가 아니면 가격을 좋게 매겨주지 않기에 울며 겨자먹기로 농부들이 하고 있는 일이다. 초록색 얼룩이 조금 있으면 어떻단 말인가? 훨씬 더 자연스럽지 아니한가?
우리가 먹는 것은 자연이 키운 농산물인가? 공장에서 찍어낸 공산품인가?
그래서 나는 결심했다. 모양과 크기로 과일의 가격을 정하지 않겠다고 말이다. 그리고 2014년 단양사과 협동조합과 함께 작은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외형은 못생기고 색도 예쁘지 않지만 맛은 그다지 차이가 없는 소위 B급 과일로 분류되는 사과를 판매하기로 한 것이다. 물론 그동안 많은 유통업체에서 B급 사과는 판매되어왔다. 어떻게? 아주 싼 가격에! 그러나 내가 하고자 하는 일의 미션은 '싼 가격'이 아닌, '합리적인 가격'으로 사과를 판매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이 사과를 흔히 A급으로 분류되는 사과의 80% 가격으로 판매하는 시도를 하였다.
‘크기’와 ‘모양’ 그리고 ‘색’으로
가격이 결정되는 대한민국의 농산물 시장
많은 소비자들이 사과를 먹을 때 껍질을 벗겨 먹는다. 그렇다면 껍질에 조금 흠집이나 얼룩이 있는 것이 무슨 큰일인가? 겉모습만 보면 속까지 썩어 있을 거라 여길 수도 있지만 B급이라고 부르는 사과의 껍질을 깎아 보면 알맹이는 너무나 멀쩡하다. 자연에서 오는 것들은 어느 하나 똑같지 않다. 다 자기 나름대로의 생김새와 역할이 있고, 존재 이유가 있다. 외모가 조금 남들과 다르다는 이유로, 조금 작다는 이유로 그들을 무시할 수 있는 권리는 아무에게도 없다.
‘B급이라고 말하지 마’ 프로젝트를 진행하며 걱정이 많았다. 소비자들의 오랜 관행과 소비 습관이 과연 바뀔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 열심히 알리면서도 실제로 소비자들이 나의 취지를 이해하고 구매해 줄지 의문과 걱정이 가득했다. B급 사과의 가격을 정상과의 80%로 판매한 이유는 농부와 소비자 모두에게 가장 공정하고 합리적인 수준이라 판단했고, 계속 싸게만 판매한다면 B급 농산물을 보는 소비자의 의식은 절대 바뀌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처음에 소비자들은 조금 당황한 듯했다. 그래도 한번 먹어 보자며 용기를 내는 사람들이 있었다. 마트에 진열된, 색깔과 크기와 모양이 일정한 과일에 익숙해 구매를 망설이던 소비자도, 막상 사과를 받아본 후에는 “아, 이런 것도 B급으로 분류되어 판매되고 있구나” 알게 되고 그동안 생각 없이 보기 좋은 것들만 사고, 이런 구조를 몰랐던 것을 반성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일단 먹어 보면 크기나 모양이 맛과는 그다지 관계가 없다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 지금 우리 가게를 이용하는 소비자들은 크기나 모양 때문에 불만을 제기하지 않는다. 대신 나는 ‘맛’ 하나는 목숨 걸고 지키려고 한다. "이런 사과가 왜 B급으로 분류되냐?"라고 의아해하는 손님들도 생기고, “B급이라지만 맛은 A급”이라며 응원의 후기를 남겨주시는 분들도 생겼다. 사과에 점 하나만 찍혀 있어도 B급으로 분류되는 현재 유통구조에 대한 문제점을 인식하면서 공씨아저씨의 미력한 움직임에 조금씩 응원을 해 주는 소비자들도 늘어났다. 시간이 지날수록 A급보다 B급 사과 주문량이 늘어났다. 판매 한 달 만에 400kg 모두 판매 완료되었다.
이 프로젝트를 진행한 이후에 여러 매체에도 소개가 되었다.
과일나라 외모지상주의, 과모지상주의
출처 : SBS 뉴스
[YTN 특별기획] 음식문맹탈출 2부 : 농부와 농사 안 짓는 농부
출처 : YTN
나는 이 땅에 뿌리 깊게 자리 잡고 있는 농산물의 외모지상주의를 깨뜨리기 위해, 아울러 농부들의 수고스러움에 대한 ‘가치’를 ‘같이’할 수 있도록 농부의 마음으로 농산물을 판매하려고 한다. ‘농사 안 짓는 농부’로 말이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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