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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끗 차이

2021.01.31

by 공씨아저씨
나는 ‘공씨아저씨네’라는 온라인 구멍가게를 운영하고 있는 과일 장수다. 이 땅에 뿌리 깊게 자리 잡고 있는 농산물의 외모지상주의를 깨뜨리기 위해, '크기'와 '모양' 중심이 아닌 과일 본연의 '맛'과 '향' 중심의 조금 다른 과일 유통을 시작한 지 11년 차에 접어든다. 먼 훗날 의미 있는 자료로 남길 바라는 마음으로 SNS를 통해서 일기처럼 썼던 과일과 농업 그리고 농산물 유통에 관한 이야기를 이곳에 아카이빙하기로 했다. 다소 거칠고 투박한 글이지만 그 나름의 의미가 있다 생각했다. 과거의 이야기들은 이미 썼던 내용이기에 실제로 글을 썼던 날짜를 별도로 기록한다. (글의 발행일과 시간차가 발생할 수 있음)




명절이 다가옵니다. 혹시나 궁금해하시는 분들이 계실지 몰라 오늘은 사과의 크기에 대해서 잠시 설명을 드려볼까 합니다. 사과의 크기를 선별하는 기준 단위는 15kg입니다. 지금은 15킬로 사과 박스가 모두 시장에서 사라졌지만 몇 해전까지만 해도 15킬로 사과 박스가 있었고, 꽤 오랜 기간 사과 박스의 표준이기도 했습니다. 지금은 5킬로가 일반적이죠. 사과 박스 크기의 변화를 보면 많은 사회의 변화들이 보이기도 합니다. 대가족에서 1인 가구로의 변화 그리고 사과 소비량 등의 데이터를요.


IMG_2341.jpg

사과 크기를 선별할 때는 '다이'라는 용어를 사용합니다. 우리말로 '번', '호' 정도로 순화해도 되지만 아직도 업장에서는 '다이'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15킬로 사과 박스 안에 몇 개가 담기는지 사과의 크기에 따라서 등급이 결정됩니다. 표를 보시면 조금 쉽게 이해하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15킬로 안에 51~60 과가 들어가는 크기를 5 다이라고 부릅니다. 5킬로로 환산하면 17~20 과가 되겠죠? 5 다이와 6 다이의 사과 가격은 다릅니다. 물론 4 다이와 5 다이의 가격도 다르죠. 사과의 기준 박스가 15킬로에서 5킬로로 변화였듯이 시장에서 선호하는 사과의 크기도 조금씩 변하긴 합니다만 클수록 비싸다고 이해하시면 편할 것 같습니다.

사과크기.jpg

명절 때 고급 선물용 상품에 들어가는 사과는 주로 3 다이와 4 다이입니다. 요즘은 5 다이까지 선물용 구성에 포함되기도 합니다. 대과 수확량이 많은 해에는 5 다이는 일반 상품으로 빠지고 올해 같이 대과가 귀한 해에는 5 다이까지 선물용으로 들어가기도 하죠. 요즘은 5 다이 크기가 유통에서 가장 사랑받는다고 합니다. 여차하면 선물용으로 나갈 수도 있고 가정에서 소비자들이 가장 선호하는 크기이기도 하니 말이죠.


제가 이 일을 10년 동안 하면서 꼭 이루고 싶은 것은 크기별로 가격이 선정되는 현재의 관습 자체를 없애는 일입니다. 해마다 조금씩 노력하고 있습니다. 저는 보통 가정에서 제일 드시기 편한 크기인 5 다이부터 7 다이까지의 사과를 가격 구분 없이 판매하려고 합니다. 농가와 합의를 이끌어 내는 과정도 몹시 힘들었고 아직도 현재 진행형입니다. 부분적인 시도는 계속하고 있지만 아직은 계란으로 바위 치기인 것이 사실입니다.


제가 은퇴할 때 즈음에는 크기에 따른 선별 방식은 꼭 무너뜨리는 것이 목표이기도 합니다.


<미생>에서 오상식 과장은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관습에만 충실하다 보면 드러나야 할 것이 가려지는 수가 있지”


사과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과연 무엇일까요? 크기라는 관습에만 충실하다 보면 정작 드러나야 할 과일의 본질이 가려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크기가 아닌 과일 본연의 맛과 향이 저는 과일의 본질이라고 생각합니다만 여러분의 생각은 어떠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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