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P는 현재 진행형
1년 만에 이곳에 글을 씁니다. 원래 쓰던 글의 주제와 관계없는 글을요. 작가의 서랍에 며칠간 묵혀두다가 가슴이 너무 답답해서 용기 내어 발행을 눌렀습니다. 이 이야기는 우리 모두의 이야기입니다.
드라마 한 편을 보고 이렇게 오랜 시간 무거운 마음이 든 적은 처음이다.
2000년에 입대하여 26개월 현역으로 군 복무를 마쳤다. 드라마를 보면서 1990년대의 배경이면 적당했을 것 같은데 2014년으로 설정한 것이 조금은 부자연스럽다고 잠시 생각했지만 '최근 1~2년 사이에 극 중에 나오는 엽기적인 가혹행위를 당한 피해자들을 유형별로 다 접해봤다.'는 군인권센터에 근무하는 분의 글을 보고 부끄러운 생각이 들었다. 나 역시 '요즘 군대는 군대가 아니다'라고 말하는 꼰대 아저씨가 되어있었다.
DP를 보는 내내 잊었다고 생각했던 군 시절 악몽의 세포가 되살아났다.
삼수를 해서 대학에 입학했고 24살이라는 조금 늦은 나이에 입대한 나는 모두에게 불편한 존재였다. 당시 우리 내무실의 말년 병장이 나보다 한 살이 어렸고, 소대장이 나랑 동갑이었다. 부사관들은 이제 갓 스물을 넘는 초임 하사관들이 수두룩 했다. 내가 있던 소대에서는 나이 많은 후임이 신병으로 들어오면 일단 갈구고 봤다. 이유는 단 하나다. 나이 많다고 기어오르지 못하게 초장부터 싹을 밟아버려야 한다는 게 그들의 논리였다.
강원도 인제군 북면 용대리 XX대대 5중대 2소대로 자대 배치를 받은 첫날 저녁. 청소를 마치고 점호를 기다리는 8시 37분 즈음. 침상 위에서 나를 세운 뒤 내 팬티를 벗기고 나의 성기를 만지작 거리며 키득거리던 한 새끼가 떠오른다. 너무나 잘 어울리게도 그 새끼의 이름은 X성기였다. 그때의 그 수치심이란... (20년 넘게 아무한테도 말하지 못했던 이야기다)
예전에 같은 직장에 근무하던 선배 한 명이 직속 후임이 납품 업체로부터 상습적으로 뇌물을 수수한 사건으로 참고인 자격으로 검찰 조사를 받은 적이 있는데 조사를 받고 난 이후에 고 노무현 대통령이 왜 극단적인 선택을 하셨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이야기를 하신 게 생각이 났다.
내가 입대했을 당시에는 이미 구타 문제로 사단 내 부대가 한번 뒤집어지고 몇 개의 부대는 공중분해되었던 시기라 구타에 굉장히 민감한 시기였지만 부대 내 구타는 여전히 존재했고 가혹 행위는 일상이었다.
드라마 DP의 주인공은 이병 안준호와 상병 한호열이 아니다. 이 드라마에서 가장 주목해야 할 인물은 일병 조석봉이다. 극한으로 치닫는 상황 속에서 조석봉 일병의 선택은 우리 사회의 모순을 그대로 보여준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군대를 다녀온 대한민국의 성인 남성이라면 이 드라마를 보고 온전히 떳떳할 수 있을까? 나는 과연 피해자이기만 했을까? 피해자라는 이름으로 무덤덤하게 체득한 폭력으로 나도 모르는 사이에 누군가에게 고통을 안긴 가해자는 아니었을까?
힘든 이등병 생활을 보내고 일병을 달고 후임이 들어오면 누구나 한 번쯤은 다짐을 한다. 우리는 절대 후임들 괴롭히지 말고 후임들한테 잘해주자고 말이다. 그러나 그 결심은 안타깝지만 그리 오래가지 못한다. 내가 살기 위해 누군가에게 폭력을 가해야 하는 조석봉 일병과 같은 아이러니한 상황에 맞닥뜨리게 되면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우리는 어느새 죄의식조차 느끼지 못하는 황병장이 되어있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한다. (물론 이 과정을 정말 힘겹게 버텨낸 이 시대의 진정한 영웅들도 있다.)
조석봉 일병이 구타와 가혹행위를 견디다 못해 탈영을 하여 황병장을 찾아갔을 때 내 머리는 '조석봉 일병 안돼! 니 인생을 생각해'라고 말했지만 내 가슴은 '그래 그 새끼 그냥 죽여버려'라고 말하고 있었다. 폐쇄된 공간에서 벗어날 수 없는 환경적 특성 탓에 끊임없이 누군가를 괴롭히고 거기에서 즐거움을 찾는 것이 인간의 숨겨진 악한 본성은 아닌지 진지하게 의심하던 시절이 군대에 있을 때였다. 한때 나는 성악설을 신봉하기도 했다.
DP의 이야기는 비단 군대에만 한정할 이야기는 아니다. 이 드라마를 보고 쓴 많은 글들을 보았다. 많은 사람들이 나 역시 피해자였다고 이야기하지만 당신은 과연 피해자이기만 했는지 나는 묻고 싶다. 그보다 우리는 더 본질적인 문제에 접근을 해야 한다. 군대라는 폐쇄적인 집단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이지만 지금도 이 사회 곳곳에 존재하고 있는 부조리의 바탕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소위 사람을 만들어 준다는 군대를 통해 국방의 의무를 마친 성인 남자들이 사회에 나와서 구축한 폭력의 대물림이 DP를 통해 우리가 마주쳐야만 할 본질은 아니었을까?
'재밌다'는 단어 함부로 쓰지 마라. 당신에게 이것은 과연 재밌는 드라마일 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