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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씨아저씨 Sep 19. 2020

못생겨도 죄송하지 않습니다

크고 예쁜 것들에 나는 여전히 물음표를 던진다

랜만에 글을 씁니다. 과일 판매하는 기간에는 글을 쓸 시간이 없습니다. 가게 홍보하려고 글 쓰는 것 같은 인상을 주고 싶지도 않아서 일부러 피하기도 하고요. 올해도 추석 전 택배 출고를 모두 완료한 뒤 조금은 여유로운 마음으로 글을 한편 씁니다. 저는 언제나 명절 전 판매를 남들과는 다르게 누구보다 빠르게 마감합니다. 이 글을 보시고 저희 사이트에 오셔도 판매하는게 아무것도 없을겁니다. 


이 글은 제가 브런치에 글을 쓰기 시작한 이유이기도 하지요. 과일의 외모지상주의에 대해 다룬 브런치북 과일로 바라보는 세상  'A 그리고 b'와 'A 그리고 B'에 이은 세 번째 이야기 정도로 봐주시면 될 것 같습니다. 두 편의 글로 마무리 해도 될 주제였지만 올해 사과를 판매하면서 2020년 현재의 시점에서 과거에 글을 쓸 당시와는 확연하게 다른 회원분들의 반응에 이건 기록으로 남겨놓아야겠다는 흥분된 마음으로 컴퓨터 앞에 앉았습니다. 이제 드디어 제가 그동안 10년 동안 꿈꿔온 상식적인 과일 소비가 자리 잡을 수 있겠구나 하는 작은 기대감을 안은채 말입니다.


 




자연이 만든 예술 작품


여러분들 눈에는 이게 무엇으로 보이시나요? 잘 모르시겠죠? 개와 새를 한 몸에 담은 동물을 '개새'라고 하던데 이건 배와 사과가 한 몸에 들어있으니 '배사'로 불러야 할까요? 여러분들이 보시는 이 과일은 '아리수'라는 품종의 사과입니다. 오늘은 2020년의 아리수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아리수(Ari秀)는 국립원예특작과학원 사과시험장(Apple Research Institutes)에서 1994년 ‘양광’에 ‘천추’를 교배 (양광x천추) 1995년~2007년 파종, 육묘 및 1차 선발과정을 거쳤으며, 2007년~2010년까지 4년간의 지역 적응시험 기간을 거쳐서 2010년 최종 선발, ‘아리수’로 명명한 국내 품종의 사과입니다. [자료 : 농촌진흥청 국립원예특작과학원]


여러분들의 마음속에 2020년은 어떤 해로 기억될까요? 단연코 '코로나' 3글자로 선명하게 새겨질 겁니다. 우리는 올해 8월에 햇빛 쨍쨍한 날을 며칠이나 보았을까요? 꽃피고 따뜻해야 할 봄에 쌀쌀한 날씨가 이어졌던 것을 기억하고 계신가요?  기나긴 장마와 봄철 추웠던 날씨로 올해는 모든 농사가 다 망가진 한 해입니다. 농민들과 저희와 같은 농산물 유통인에게는 정말 최악인 한 해입니다. 


냉해로 열매를 맺지 못하고 죽어버린 사과꽃들(2020. 5. 4)


봄에 꽃이 피어야 할 시기에 추운 날씨 때문에 꽃이 피지 못해 벌들이 꿀을 만들지 못해 올해 꿀은 전멸했고, 사과는 꽃이 피고 수정되어 열매를 맺어야 할 시기에 추위로 인해 냉해 피해를 많이 입었습니다. 일부는 열매를 맺지 못했고 수확을 앞둔 아리수 사과는 거의 대부분 이런 사과가 되었습니다. 


2020 판매한 아리수 실제 상품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저는 올해 9월에 동록 가득 머금은 아리수를 판매했습니다. 판매를 시작하며 아래와 같은 공지를 올렸습니다. 실제 상품페이지에 기재된 내용입니다.





2020년 아리수는 빨갛지 않습니다. 껍질도 많이 거칩니다. 그 이유에 대해서 잠시 설명을 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2020. 8.24 아리수의 모습


올해 8월 24일 밭에 방문했을 때 작년 같으면 어느 정도 울긋불긋한 빛깔로 뒤덮여 있어야 할 사과밭이 누런 배밭처럼 보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올봄 냉해 피해의 결과입니다. 동록(銅綠) 현상이라고 하는데요. 철에 녹이 스는 것처럼 껍질이 누렇게 변하고 거칠어지는 현상입니다. 흔히 현장 용어로 사비가 끼었다고 이야기를 합니다. 이미 초여름 사과가 작은 방울토마토만 한 크기였을 때부터 겉모습이 이 상태였습니다.


2020. 6월 초 이미 동록 현상이 나타난 아리수


동록 현상은 아리수 품종 특성상 원래 잘 생기고, 다른 사과에서도 자주 보는 증상이지만, 그 부위가 크지 않아서 그동안 크게 의식하지 못하고 드셨을 겁니다. 참 재밌는 건 사비가 낀 거친 사과가 맛이 더 좋아서 이 사과만 찾으시는 분들도 있다는 것입니다. 


아리수의 원래 모습은 이렇습니다. (2019년 아리수)


사과의 절반 이상에 동록이 끼었습니다. (2020)


제가 직접 맛을 보았지만 맛에는 아무런 이상이 없습니다. 농산물 시장에서도 여전히 외모지상주의가 판을 치고 있는 현재의 유통 구조속에서 이 사과를 B급이 아닌 보통 사과로 판매해야 하는 것은 그동안 제가 걸어온 길이고 공씨아저씨네의 중요한 임무이기도 합니다. 올해 사과 가격이 폭등하였지만 저희는 시장 상황 관계없이 오직 저희 방식으로 상식적인 가격으로 판매를 진행하기로 농가와 협의를 하였습니다. 


공씨아저씨네는 크고 예쁜 과일보다 본연의 맛과 향이 살아있는 과일이 더 좋은 대접을 받아야 한다는 신념으로 10년째 운영하고 있는 작은 과일가게입니다. 올해도 소신과 원칙을 지키며 아리수 사과를 판매합니다. 혹시 선물용으로 주문하시는 분들은 신중히 판단하고 주문해주시길 궁서체로 부탁드립니다.






판매는 예상외로 단숨에 완판이 되었습니다. 어리둥절했습니다. 지금까지 사과가 이런 빛의 속도로 판매된 것은 처음이기 때문입니다. 맛에는 자신이 있었지만 과연 실제로 회원분들이 이 사과를 접했을 때 저처럼 자연이 만들어낸 아름다움에 감격할지 아니면 당황해서 차마 먹어보겠다는 엄두를 내지 못할지 짐작조차 되지 않았습니다. 


지난 10년의 세월 동안 정말 저한테는 무수히 많은 일들이 있었으니까요. 버릴 것을 판 몹쓸 사기꾼이라는 소리든는건 일쑤였고요. '저는 과일 외모 안 보니까 걱정하지 말고 보내세요' 했던 지인이 막상 과일을 받으시고는 '그래도 이건 너무 심한 것을 보내셨네요'라는 반응이 이제는 일상이 되었습니다. 인간관계도 많이 정리되었습니다. 


사람들의 고정관념은 그리 쉽게 변하지 않는다는 걸 경험으로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명절이 가까워지면 제가 선물로 주문하시는 분들은 신중히 판단하고 주문하시라고 궁서체로 부탁드립니다. 남들과는 다르게 누구보다 빠르게 명절 전 판매를 마감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사과는 배송을 시작했고, 배송을 받은 회원분들이 SNS에 후기 내지는 댓글을 남기기 시작하셨습니다. 메시지를 보내주시는 분들도 계셨고요. 한 품목에 이런 빠르고 열광적인 반응은 정말 오랜만입니다. 아마도 회원분들 입장에서는 반전이라고 생각하신 듯합니다. 그 느낌을 그대로 전달해드리기 위해 후기들의 전문을 올립니다. 



사과의 못생겼다는 기준이 무엇인가?




자연의 색은 원래 한가지가 아니에요




과일에 대한 태도를 생각해보게 한다




아름다워 산 과일은 처음




과일의 선구자, 시조새












못생기고 작아도 맛만 좋다면

지금 이 순간에도 후기는 계속 올라오고 있습니다. 저는 '경험'의 중요성을 늘 강조합니다. 소비자들이 갖고 있는 고정 관념은 크기와 모양, 색으로 선별하는 현재의 농산물 등급 기준에서 맛은 크기와 모양과는 관계가 없다는 것에 대한 경험이 없기 때문은 아닐까요?


저는 과일을 크기로 차별하지 않고 외모로 차별하지 않습니다. 흔히 시장에서 작고 색이 좋지 못하고 못생긴 과일은 싸게 판매합니다. 작고 색이 좋지 못하고 못생긴 과일이 크고 색 좋고 예쁜 과일보다 맛있다면 가격과 대접도 지금과는 반대로 되어야 맞는 것 아닌가요? 이제 제가 생각한 상식이 소비자분들이 생각하는 상식과 그 격차를 조금씩 줄여나가고 있는 듯합니다. 


올해 아리수를 판매하고 회원분들께서 보여주신 반응에 이제는 제가 하는 이야기가 더 이상 미친 소리로만 들리지 않을 수 있겠다는 자신감을 얻었습니다. 저희 과일을 접하면서 '경험'을 한 회원분들은 이제 아시겠죠. 과일의 맛은 외모와는 관계가 없다는 것을요. 맛만 좋다면 작고 못생긴 것들이 크고 예쁜 것들보다 더 비싸도 이상할 일이 아니라는 것을요. 


10년이 걸렸습니다. 



나는 ‘공씨아저씨네’라는 온라인 구멍가게를 운영하고 있는 과일 장수다. 농사의 농자도 모르는 채 이 일을 시작한 지 벌써 10년 차에 접어든다. 막상 일을 시작해 보니 농산물 유통구조는 나의 상식으로는 이해가 안 되는 것 투성이었다. 사회에 만연해 있는 '외모 지상주의'가 농산물 시장에서도 뿌리 깊게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은 큰 충격이었다. 그래서 나는 '크기'와 '모양' 중심이 아닌 과일 본연의 '맛'과 '향' 중심의 조금 다른 과일 유통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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