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the death'
얼마 전 넷플릭스(netflix)를 통해 '죽음'과 아주 밀접하게 연관된 두 편의 드라마를 보게 되었다.
'지옥(hellbound)'과 '무브 투 헤븐(move to heaven)'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두 드라마 모두 죽음에 대해서 다루고 있지만 전혀 상반된 분위기와 동시에 시사하는 메시지가 다름을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다. 최근 전 세계적으로 선풍적인 인기를 얻었던 '오징어 게임' 덕분에 마치 한 편의 후속작처럼 등장한 '지옥'은 비교적 많은 스포트라이트를 받을 수 있었다. 재미는 둘째 치고, 작품을 통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심오하고 깊다는 표현으로 외국에서는 '오징어 게임'을 뛰어넘는 대작의 탄생이라 극찬을 했다.
그러나 개인적으로는 지옥이 주는 우울하고 암울한 분위기의 죽음보다는, 차마 웃을 수는 없으나 죽은 이의 가는 길을 비교적 따스하게 어루만져 주었던 '무브 투 헤븐'이 훨씬 더 좋았다. 단순히 가볍게 한국 드라마나 영화에 대한 선망으로 억지스러운(?!) 흥행을 일으키려는 목적을 가진 게 아니라면, 나는 단연코 '무브 투 해븐'의 손을 번쩍 들어주고 싶다. 우리의 고유한 정서를 담아냄과 동시에 죽음에 대한 보다 진지한 자세를 가질 수 있었으니 말이다.
지옥(hellbound)
드라마 '지옥'은 불특정 다수가 천사로부터(악마에 더 가까운 얼굴을 하고 있지만) '고지'를 받는 내용이 주를 이룬다. 그리고 그들은 고지된 특정일에 어디선가 갑자기 등장한 천사들(괴물에 가까운)에게 죽임을 당한다. 새 진리교의 일당들은 고지받은 자의 죽음을 '인간의 죄'와 연관 짓기 위하여 부단히 애를 쓸 뿐만 아니라, 사유를 만들어내기도 한다. 물론 우리가 일반적으로 이해하는 상식선을 넘어가는 부분이 더 많지만, 인간 본연의 죄를 지음에 대한 두려움을 건드리고, '착하게 살아야 한다'는 메시지를 강조한다.
그러나 이제 갓 태어난 갓난아기의 고지 앞에서 도무지 풀리지 않는 '죄'에 대한 문제로, 인간의 죽음과 죄의 상관관계를 더 깊이 있게 고민해보고 생각하게 만든다.(기독교에서는 모든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죄를 가지고 있다는 '원죄론'을 가르치고 있다)
무브 투 헤븐(move to heaven)
드라마 '무브 투 헤븐'은 사람들 간의 감정을 공감하지 못하고 관계를 맺는 것을 어려워하는 아스퍼거 증후군이 있는 '한그루'라는 주인공이 중심이 되어 죽음에 대해 더 깊은 고찰을 하게 만든다. 아스퍼거 증후군이 있는 반면 그는 천재적인 기억력과 추리력을 소유했다. 그가 아버지를 뒤이어 '유품 정리사'로 죽은 이들의 고유한 이야기들을 풀어내는 장면들은 드라마에 더욱 몰입하게 하는 매력을 뿜어낸다.
지옥과는 달리 이 드라마에서는 인간사에 유일한 100%의 확률을 가지고 있는 죽음에 대해 누구나 피해 갈 수 없으며, 자의든 타의든 이 죽음을 맞이하는 자세에 대해 보다 상세하고 감성적으로 접근을 한다. 내가 '지옥'보다 '무브 투 헤븐'이 더 죽음을 더 아름답게 그려냈다고 평가하는 이유는 단순히 서정적이고 감성적인 표현과 자극적이고 화려한 영상미의 구분 지음은 결코 아니다. 죽음을 바라보는 당사자와 죽은 이를 바라보는 가장 가까운 사람들의 감정선이 보다 현실적이고 '사람 냄새'나게 표현되었기 때문이다.
죽는다는 것은 무엇일까?
죽는다는 것은 무엇일까? 다시는 지우거나 수정할 수 없는 영원한 마침표를 한 사람의 이야기에 표기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아쉬우면 아쉬운 대로, 서러웠다면 서러운 대로, 있는 그대로 고이 간직하는 것.
오늘 밤, 불현듯 내게도 찾아올 수 있는 그 죽음이라는 반갑지 않은 손님이 만약 예고 없이 찾아온다면 나는 만나고 싶지 않은 그 손님을 맞이할 수 있는 어떤 준비를 해야 하는 것일까? 생각하고 싶지는 않지만 생각이 없어서도 안될 것이다. 당연하다고 여기는 밤의 달과 낮의 해가 매일 주어지는 선물임을 깨닫고 매일을 기쁨과 감사로 인정할 수 있는 순간까지, 매일을 겸손하게 그리고 요란하지 않게 자리에 눕고 일어서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