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절, 우리가 그리워 했던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해 우리의 삶의 양식은 완전히 달라졌다.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생활하던 모든 활동들은 어느새 랜선을 타고 온라인으로 반경을 옮겨가게 되었다. 어른들의 회사와 사업장뿐만 아니라 마음껏 배우고 뛰놀아야 할 학교 역시 기한을 알 수 없이 선잠을 자고 있다. 그러다 보니 그토록 지루하고 탈출하고만 싶었던 학교가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그리워지는 곳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국민학교 입학, 초등학교 졸업
‘경기도의 최남단 자리 잡은 터 잔디 풀 고운 터에~’
따가운 햇빛 내리쬐는 운동장 한가운데서 아침 조회가 있을 때면 언제나 목청 터져라 힘차게 불렀던 교가의 첫 소절이다.
1991년, 여덟 살의 개구쟁이였던 나는 팽성 국민학교에 입학하였다. 지금은 매우 생소한 단어이긴 하지만, 지금부터 약 30여 년 전에는 초등학교라는 단어가 반대로 낯설고 어색하기 그지없었다.
늘 진보(?)하는 교육과정 덕분에 나는 입학한 국민학교를 끝내 졸업하지는 못했다. (대신 대한민국에서 처음으로 초등학교를 졸업하는 졸업생 기수가 되었다)
교가의 첫 소절에서 알 수 있듯이 내가 다녔던 초등학교는 시골 한가운데 터를 잡은 작고 아담한 학교였다. 학급이라고는 각 학년마다 하나뿐이었고, 한 반이라고 해봐야 고작 스무 명이 채 되지 않는 분교에 가까운 작은 학교였다. 그래서일까? 지금은 감히 시도할 수 조차 없는 예쁘고 아련한 추억이 교정 곳곳에 가득했다.
‘소 똥을 밟고 넘어지면 재수가 좋다더라’
당시 집에서 학교까지 가는 교통편이 없었기 때문에 언제나 나의 등하교길은 십일 번 버스(두 다리)뿐이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바람이 부나, 언제나 등하교길에는 나와 같이 십일 번 버스를 타고 가는 선후배, 친구들이 줄지어 길의 곳곳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한 날은 학교에서 집으로 가는 길에 앞서 가는 친구들이 몇 발자국 가다 넘어지고, 일어나 몇 발자국 가다 넘어지고를 반복했다. 뒤따라가는 나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진풍경에 킥킥대며 실컷 웃고 또 웃었다. 그러자 한 친구가 나지막이 물어왔다.
“너 왜 사람들이 앞에서 넘어지는지 알아?”
알리가 없는 나는 고개를 좌우로 휘휘 내저었다.
“바보야, 그것도 모르냐?
소 똥을 밟고 넘어지면 재수가 좋데”
누가 낸 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그날 집으로 가는 그 길에서 수 없이 넘어지고 일어서는 사람들을 보았다. 그리고 재수가 좋다는 말에 앞서가는 사람들을 보고 한참을 웃으며 나도 뒤따라 넘어졌다. 정말 그 이후로 재수가 좋았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날은 나도 길 가에 흩어 뿌려진 소 똥을 발견하면 어색하기 그지없는 엉거주춤한 자세로 밟으며 넘어졌다.
낡은 추억의 서랍에서 아련함을 들추어 보다
지금도 가끔 한적한 어느 곳에 걸터 앉아 푸른 하늘을 올려다 보면, 그리웠던 어린 시절의 내가 아지랑이 피어 오르듯 살며시 보인다.
멀리서 들려오는 경운기 소리에 마치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발견한 듯 달려가 뒤에 매달려 탔던 집으로 가던 그 길.
“에... 마지막으로...에... 여러분에게...에.... 한 마디만... 에.... 더하자면...에..”
말 끝마다 ‘마지막으로’를 남발하며 20분은 더 말씀하시던 지루했던 교장 선생님의 아침 조회 시간.
책걸상을 들고 운동장으로 나가라던 선생님 말씀에 나가보니 ‘찰칵’ 단 한 장에 담긴 우리의 초등학교 졸업사진.
‘따르릉 따르릉 전화 왔어요. 청군이 이겼다고 전화 왔어요. 아니야 아니야 그건 거짓말 백군이 이겼다고 전화 왔어요’ 노래를 누구보다도 크게 불렀던 운동회의 응원.
이제는 다시 돌아갈 수 없기에, 낡은 추억의 서랍에서 한 장면씩 꺼내어 적막한 하루를 촉촉이 적시며 나에게 작은 미소를 선물한다.